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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872호의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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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하이디

하이디는 트릭컬에 등장하는 나르시시스트 종족차별주의 깐프 기자다. 그 인성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자로서의 적성만큼은 모나티엄 적성판별기가 제대로 가려냈다. 취재 과정에 온갖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고 가끔은 교묘한 과장과 기만으로 가득찬 기사를 써내려가지만 그 모든 혐성 행위가 “특종을 쓴다”라는 하나의 목표로 수렴하는 결과에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하이디가 처음 등장한 테마극장 <찰칵! 간직하고픈 비밀>는 기본적으로 착각으로 시작된 잠입취재 이야기라 그 글솜씨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위 삽화는 마라톤 취재하라고 보내놨더니 셀카를 찍고 앉은 미친 나르시시스트의 모습이다. 대특종 기사 한 번 내더니 월클병에 걸려 오히려 제대로 기자 정신을 발휘 못하는 일종의 슬럼프가 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도 스토리 <특종! 그날의 이야기>에선 마침내 멋진 기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인터뷰 대상자들을 하등종족으로 대하는 깐프 중 깐프의 모습은 어디 안 가지만 글쓰는 모습만은 프로페셔널하다. 특히, 언뜻 콩가루처럼 뭉쳐지지 않는듯한 취재 자료 사이에서 하나의 테마를 찾아 글로 엮어내고 추가 인터뷰를 나가는 장면이 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길고 어려운 연구에서 핵심만 뽑아내서 발표나 논문으로 엮어냈던 경험이 겹쳐보였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이렇게 글을 쓰는 과정에 딱 맞는 것 같다. 어지럽게 흩어진 소재를 하나의 글로 엮어내는 과정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걸 보면 역시 작가는 소설이든 논픽션이든 글을 많이 써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마극장 <뜨거운 도시의 믿을만한 녀석>에서는 엘프 장교 헤일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해일리는 엘프들 사이에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이 테마극장에서는 헤일리가 바로 전쟁을 패배로 몰아넣은 결정적인 실책의 당사자라는 내막이 밝혀진다. 하이디가 이 내막에 관해 쓰는 기사 내용이 도입부와 결말부의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데, 그 글도 보면 문장력이 흡입력이 있다. 글 속의 짧은 조각글이지만 그 캐릭터성으로서의 글솜씨가 잘 드러난다.

또, 헤일리가 실망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이 이야기 자체도 관점을 살짝 비틂으로써 오히려 헤일리를 반성하는 엘프의 귀감으로 그려내는 반전을 자아낸다. 이렇게 이미 정해진 사실 관계도 언어로 해석하고 풀어내는 과정에서 마법처럼 의미가 뒤집힌다. 그런 점에서 저널리즘의 영향력은 대단하면서도 기묘하다. 관측자이자 전달자에 불과했을 기자가 그 관측과 전달만으로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은 가히 양자역학적이고 현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어찌보면 하이디처럼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내 경우에 그 글이란 연구자에게 읽힐 논문이다. 고전이라 불리우는 논문들을 읽어보면 그 연구가 제시한 답만 놀라운 게 아니다. 문제로부터 답에 도달하고 다시 그 답이 현실의 사례로 구체화되는 흥미진진한 플롯이 있다. 또 그 하나의 개념에 뒤따라 이어지는 수십년의 패러다임을 따라가다보면 논문도 참 재미있는 글이다. 하이디의 스토리를 읽으며 글 쓰는 일의 재미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됐다. 그 재미에 이입이 되는 걸 보면 새삼 나도 글 쓰는 직업의 일종이구나 싶다. 내 글도 언젠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빠져들게 되는, 읽을 맛 나는 글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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