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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안팔릴 이야기

왼손잡이해방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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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더럽게 안팔릴 이야기다.

시작은 너무 사소하고,

전개는 너무 늘어지며,

위기는 너무 뜬금없고,

결말은 항상 허무하다.

-서른네번째주인공 中-

(셋하나둘은둘셋하나, <주인>, <<좀비 세상>>.)

셋하나둘은둘셋하나는 가끔 가상문학을 인용한다. 검색해도 안 나오는 시다. 그런 게 여럿 있는데 저건 그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항상 저 시를 찾으려고 한참을 뒤져본다. 여기다가 써놓으면 이제 안 뒤져도 된다. 야호!

하려던 얘기가 있었는데 가물가물하다. 글귀를 찾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밤은 길다. 영원처럼 길다. 그런데 여름밤은 짧다. 아침이 온다. 깬 채로 아침해를 맞으면 기분이 더럽다. 영원한 밤은 환상으로 사라진다. "너의 고독도 모두 드러내는 아침이다." 그래서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다. 그날밤을 영원한 채로 끝낸다. 아침엔 비가 왔다. 북촌 거리를 걷는 상상을 했다. 한참을 유튜브를 헤매다 다시 잠에 들었다. 깨고나니 비는 그쳤다. 슬프다. 어차피 혼자 가야 재미도 없었을테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누구와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게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겠지. 맛있는 것을 먹는 데도 흥미가 없다. 누구와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가? 결단코 아니다. 흔히 기억이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한다. 기억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인가? 기억은 계속 쌓이고 바뀐다. 나는 언제나 내가 아니게 되는가? 차라리 성격이 나다. 성격은 안 바뀌나? 나는 영원히 자라지 못하나? 자라는 것도 자라지 못하는 것도 모두 공포다. 삶은 공포다. 차라리 나는 관계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이것들 모두겠지. 사람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난 그런 불완전함까지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다고 집에 있는 것도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가? 차라리 집 밖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안이든 밖이든.... 무인도에 간다면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를 묻기 전에 무인도에 가고 싶은지 물어야 한단다. 나는 무인도에서는 못 살 것이다. 아니 살 것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무서워서 죽을 때쯤 일어날 것이다.

매일매일에는 보람의 총량이 있다. 하루가 보람차면 밤에 잘 잔다. 하루가 보람차지 않으면 억울해서 잠들지 못한다. 할 일이 없으면 차라리 자고 싶다. 할 일이 있어도 하기 싫으면 자고 싶다. 잠은 도피처다.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딱 8시간만 죽어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아무것도 못하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언젠가 인격 이식의 시대가 올 것이다. 늙은 몸을 버리고 새 몸에 옮겨 수천년을 살 수 있을테다. 그렇게 되면 한가지 무서운 것은 이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옛 육체에 깃든 정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옛말로 말하자면 나는 죽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덜덜 떨고 있을 즈음 애초에 의식은 연속적이지 않다는 것이 생각났다. 잠들듯이 옛 몸을 버리고 깨듯이 새 몸에 깃들면 그럭저럭 괜찮을지도 모른다. 조금 어색하긴 하겠지만 그거야 고3 때 기숙사의 마지막 밤을 지낼 때나 1학년 때 마지막 물리학 시험을 치며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과학 수업이구나 생각했던 싱숭생숭함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끔 원래 몸은 이렇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은 들겠지만 그거야 시력이 나빠져 나와 밤하늘 사이 유리창을 두지 않고서는 소통할 수 없게 된 슬픔보다 더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이야기는 사건이 중심이다. 사건이 없어서는 부조리극 같은 것이다. (부조리극에 관해서는 나무위키를 읽고 안 것이 전부다.) 아주 파괴적인 형태의 이야기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의 글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사건이 없다. 주로 원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니 설정 놀음이다. 나는 슬픈 영화를 본다. 최근은 <클라나드>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 눈물이 날 때에는 어떤 통쾌함이 있다. 내게 어떤 울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는데 슬픈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논리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도 내 감정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공허한 느낌만 남아있다. 그래서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면 눈물이 잘 난다. 나는 웃는 만큼 자주 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왜인지 들뜨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왜 기분이 좋은지 생각한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날도 있다. 그 때만큼은 무언가 운이 좋은 거겠지. 그런 기분 좋음은 낯설다. 그러다 평소와 같은 푸르스름한 차분함이 돌아오면 그때는 집처럼 편안하다. 왜 기분이 울적한지 생각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다른 자극이 없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기질인 것 같다. 트라우마나 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나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니시오이신의 <이야기 시리즈>는 주로 그런 내용이다. 나의 숨기고 싶은 떼어내고 싶은 부분까지 모두 나의 부분으로 받아들여 긍정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실로 내가 읽은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한때는 그것이 두려웠으나 지금은 읽을만큼 읽었기 때문인지 그것이 자랑스럽다. 더 읽어도 좋을 것이다. 더 큰 사람이 되겠지. 한편으로는 누구나 그런 것이겠지. 현대를 살며 실존주의에 영향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문화에 스며들어 숨쉴 때마다 우리의 폐를 드나든다. 데카르트는 내가 보는 빨간색이 네가 보는 빨간색과 같은가 질문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 꼭 데카르트를 읽지 않더라고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대단히 똑똑하기 때문일까? 내 생각엔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가 기하학을 호흡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기하학을 하며 이 세상의 이치도 공리와 증명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산다. 고전역학의 예측가능성이든 양자역학의 예측불가능성이든 과학의 언어로 정리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공기에서 헤엄치며 우리는 본다는 사실 자체에도 과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린 모두 세상이 가르친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늘 그렇듯 부분적으로 그러한 것이고 스스로 생각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다만 배운대로 생각하는 부분이 은근히 크다는 것을 내 스스로 느꼈을 따름이다.

뭐였더라, 지난 주말에 셋하나둘은둘셋하나의 모든 만화를 정주행하면서 잊고 있던 이야기들 속에 내가 했던 생각들을 발견하며 놀랐다. 그러면서 더 생각하기를 이런 이야기들도 저런 소설이나 영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겠구나 싶었다.

자야겠다. 덕분에 보람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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