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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767호의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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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이끌어내는 손전등

종종 이상한 질문을 하고는 한다.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가지고 싶은 도구가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다양한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만화에 흔히 등장하는 개쩌는 능력이 있는 용사의 검? 주문만 외우면 물리법칙을 벗어난 현상도 일으킬 수 있는 마법 지팡이? 그 어떤 잡일이라도 시키면 나 대신 해 주는 만능 로봇? 이제 이런 것들은 너무 식상하다. 너무나도 많은 매체가 묘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현실적인 무언가를 내가 가지게 된다면 나만이 쓰게 될텐데, 그렇다면 뭔가 나만의 유니크한 특징과 취향을 섞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손전등을 생각해 보았다. 당연히 그냥 손전등은 아니다. 이 손전등은 내 맘대로 빛의 파장을 조절할 수도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그 어떤 원하는 색이든 생각만 하면 뿜어낼 수 있다. 수많은 영롱한 빛깔을 내게 비추어 보여주는 레인보우 손전등, 그 자체만으로 뭔가 그렇게 쓸모 있진 않아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이것저것 색깔들을 생각해 보면서, 점차 내가 좋아하는 색을 찾게 되겠지. 가장 마음에 드는 색을 찾으면, 방 한 구석을 그 색으로 비추고 그곳을 바라보면서 나만의 행복한 세상을 잠시 상상하게 될 것이다. 난 나뭇잎들이 만들어 내는 초록색을 좋아하니까, 아마도 내 상상은 이파리 색깔의 녹색에서 시작하리라.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개성은 있어도, 조금 더 도움이 되는 것이면 좋겠다. 그렇다면 손전등에 새로운 능력을 추가해 보자. 이 손전등은, 어떤 물체를 의도하여 비추면, 비추어진 물체 그 자신이 빛을 발하게 된다. 잘 다듬어진 보석마냥 단순히 빛을 예쁘게 반사해서 영롱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곧 광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걸 내 핸드폰에 비추면, 내 폰은 손전등 기능을 켜지 않더라도 빛을 내게 될 것이다. 그것도 카메라가 달린 한 방향이 아닌 전 방향으로. 이걸로 읽고 싶은 책을 비추면 따로 조명을 켜지 않더라도 어둠 속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며, 길거리에서 자갈을 하나 주워와 비추면 그건 나만의 영롱한 보석이 될 것이다.

비추어진 물체가 발하게 될 빛의 색깔은 손전등의 빛 색과 다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건강한 나뭇잎을 보라색 빛으로 비춘다고 해서 그 나뭇잎이 보라색으로 빛나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할 것이다. 비추어진 물체는 손전등의 빛 색이 무엇이든 그들의 고유 색으로 빛난다. 그렇다면, 난 밤에 공부할 때 책상을 푸근한 초록색으로 비추기 위해 이런저런 나뭇잎들을 모아 내 작은 손전등으로 비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아기자기하게 빛나겠지. 어둠 속에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는 내 마음이 조금 더 풍성해질 것 같다. 아니면, 온갖 물건들을 다 가져다가 손전등으로 하나하나씩 비춰보고, 어떤 색깔의 빛을 낼지 관찰하는 것도 되게 재미있을 것 같다.

이렇게 비추어진 물체들은, 손전등을 치워도 계속해서 자기들만의 아담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나에게만 보일 것이다. 내가 더 많은 밝음을 원하면 더 강하게 빛을 낼 것이고, 어둠을 원하면 빛은 사그라들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가 비춘 물건들이 어떤 색으로 빛을 낼지, 그 세기가 시시각각 어떻게 변하는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 모든 빛은 나에게만 보이는 빛이니까. 그렇게, 내가 손전등으로 정성스럽게 비춘 물건들은 나만의 소중한 물건이 된다. 그 손전등은, 내게 주위 어떤 것이든 '나에게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야말로 나만을 위한 기이한 물건이다.

그러면 또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손전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추면, 또 나 자신을 비추면 어떻게 될까. 난, 종종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색을 발하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당연히 현실의 인간 개체들은 흑체 복사로 적외선을 뿜어내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그 색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서 발하는 색을 이 작은 손전등을 통해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걸 관찰하는 것 또한 흥미로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녹색을 발하는 사람을 우연히 찾게 된다면, 뭔가 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온갖 색깔을 무지갯빛으로 내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궁금해서라도 말 한 마디 정도는 걸어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뿜어내는 색을 거울을 통해 보게 된다면 그 때의 나는 그 빛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그 빛에는 내가 세상을 마주하는 모든 자세가 압축되어 담겨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