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재미가 부족하다는 것은 이젠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아마 갈만한 관광지가 부족하다는 이유겠지요. 대전을 (거의) 3주 연속(예정)으로 방문하면서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전은 과학의 도시라는 관점입니다.
첫번째 방문은 오래 알고 지낸 선배를 오랜만에 보러간 것이었습니다.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대전역에 내렸습니다. 황량하되 잼민이가 많더군요. 작고 밋밋한 역이었습니다. 여행을 가면 그 곳의 거리 풍경을 유심히 뜯어보는 편인데요, 서대전역 근방에서 느낀 것은 길이 넓고, 넓고… 그 외엔 별다른 특징이 없었습니다. 인도가 차도만큼 넓은데 그 위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주도 거리를 시원시원하게 넓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대전과 달리 광주는 길이 지루하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소소한 요소들이 잘 꾸며주고 있었죠. 대전은 건물이 하나같이 네모나고 밋밋하고 그랬습니다.
1박 계획을 취소하고 저녁에 올라온 건 피곤했던 것도 있지만 아마 길거리가 지루했던 탓도 있겠지요. 돌아오는 길에서 기억에 남는 건 역 앞에 관광 안내판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근방 골목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이 가장 재미있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방문은 카이스트에서 열린 학회에 간 것이었습니다. 2박3일을 지냈지만 첫 이틀은 학교와 호텔만 오갔고 마지막날에는 성심당을 방문했습니다.
카이스트 주변 거리에서 특이했던 점은 신호등과 횡단보도 체계였습니다. 갑천 옆길에는 삼거리가 많습니다. 보통 삼거리에는 각 도로를 건널 수 있도록 횡단보도가 3개 설치될텐데요, 여기에는 언제나 2개의 횡단보도만이 설치되어있습니다.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가 하면 다리 입구에는 횡단보도가 아예 없기도 합니다. 보통 여기쯤 있지 않나 싶었지만 지도 앱을 보니 다리 밑 도로로 지나가라더군요. 마치 이 도로를 설계한 사람이 “모든 node가 reachable 하면 그만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 횡단보도 신호등도 특이하다면 특이합니다. 보통 빨간불까지 남은 시간은 파란불이 깜빡일 때 세기 시작하지만, 이 근방에서는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세더군요. 그 시간도 20초 이내로 꽤 짧았습니다. ‘과학의 도시’라는 키워드와 연결하여 생각해보니 예측가능한 교통 상황 속에 효율적인 도보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사거리에도 횡단보도가 셋 뿐일까 하여 새어보니 여기는 제대로 네 개가 있더군요. 그러다 얼핏 사거리는 각 방면이 대칭이니까 신호 체계도 대칭으로 짠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쯤되니 슬슬 무섭기도 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차도 안 다니는데 그냥 파란불로 해주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기서는 철저하게 모든 방향의 신호등이 직좌/도보의 조합으로 켜져 그런 불만은 나오지 않는 구조였습니다.
언젠가 대전에 사는 친척의 차를 탔을 때 “이 길에서는 신호를 한 번만 잘 받으면 끝까지 한번도 빨간불에 안 걸리고 갈 수 있다”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과학교통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온 도시의 신호등 주기를 특정 배수로 싱크를 맞춰놓았겠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교통에 이 정도로 과학력을 들였다면 도시 경관도 마찬가지겠지요. 철저히 실용주의를 중심으로 설계하여 확장성은 높이되 이런저런 bloatware(OS 등에거 기본으로 깔리지만 잘 사용하지 않는 소프트웨어)는 철저히 배제하여 지으니 그렇게 된 게 아닐까요. 아주 넓고 아무것도 없는 길이 된 것입니다.
과학의 도시 얘기는 이쯤 하죠. 대전은 또 성심당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학회에는 간식으로 성심당 쿠키와 빵이 제공되어 참가자들의 호평을 샀습니다. 지역 특색을 아주 잘 활용한 것 같아요. 성심당 본점 주변엔 아예 성심당 거리도 조성되어있다네요. 우스갯소리로 한국을 삼성이 책임진다면 대전은 성심당이 책임지는 게 아닐지요. 대전을 배경으로 한 사이버펑크 도시를 만든다면 초거대 악덕 기업의 자리에는 성심당이 자리잡아 도시의 경제를 쥐락펴락할 겁니다. 대전이 노잼인 건 성심당 주변으로 모든 재미가 모여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안 그래도 재미 총량이 작은 도시에서 성심당이 모든 것을 독차지해버린 거죠.
개인적으로는 갑천 변의 자전거길, 산책로도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변의 저지대로 차도가 쭉 나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철도를 건너려고 내려왔나 했더니 그 길로 물 옆을 주욱 달렸습니다. 물이 찰랑거릴 것 같은 다리도 건너구요. 드라이브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성심당만큼 이름을 널리 알리기는 쉽지 않겠죠.
요즘 밀고 있는 문장은 “새로운 도시는 여행할 때는 그곳의 XX를 해보아야 한다”입니다. XX의 예로는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피씨방에 가거나, 편의점을 들르거나 하는 식으로 어느 도시에서나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도시만의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달까요. 사실 대부분은 헛소리지만 있어보이는 말입니다. 완전히 헛소리는 아니기도 하구요. 여러분도 새로운 장소에서 해봐야할 XX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대전에 와서 발견한 건 “새로운 도시에 가면 그곳의 횡단보도를 건너봐야 한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