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해방연대 아지트

사용자 확인중...

일지 626호의 개정판

본문 보기

소설을 읽으면 좋은 점

소설을 읽으면 좋은점은
어디선가 소설 같은 나레이션이 들려와서 내 삶을 변명해준다는 것이지

한강의 단편집 <노랑무늬영원>을 읽고 한 시간만에 쓴 감상평이다. 한 시간동안이나 이 감상평을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왜인지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방에 다녀왔을 뿐이다. 노래방에는 한 달 전에 채워놓고 거의 쓰지 못한 110곡이 그래로 남아있었다. 내 노래방 계정의 비밀번호는 아주 간단해서 누구나 옹졸한 마음을 품는다면 몇 곡이고 마구 빼돌릴 수 있을 테고 매번 필시 누군가 그렇게 두세곡씩 빼돌리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지만 나는 아무렇게나 골라져 있는 숫자를 외우려들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몇 곡 빼돌린들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이어서 상상한다. 오늘 노래방에 가는 기분은 좋은 기분이었지만 결국에는 늘 부르던 시원시원한 노래들을 불러야 했으므로 Creep 같은 암울한 노래도 어쩔 수 없이 오늘의 플레이리스트에 껴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감정을 이입하거나 가사를 음미하며 부른 것은 아니고 중간중간 딴생각마저 하면서 재밌게 부를 뿐이었다.

돌아오면서 떼로 거리를 거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컴퓨터공학부 21학번 동기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우리집에서 가까운 동아전에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실은 난 그들이 나를 알아본 것보다 한 세발정도 늦게 그들을 알아보았는데 이는 나의 시력이 애매하게 처참함에도 불구하고 애매하게 처참한 것은 오히려 볼 필요 없는 것들을 흐리게 안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며 안경도 렌즈도 쓰지 않는 내 평소의 습관 때문이었다. 오늘처럼 길 가다 마주친 얼굴이 흐릿한---기억에 흐릿한 것은 아니고 단지 내 시야가 광학적으로 흐릿할 뿐인---경우에 약간의 어색한 순간이 스치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어색함은 지루한 삶의 귀여운 고난이라고 여겨 사랑스럽게 품고 살아가는 중이다.

그들과 동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대학원 입학지원서를 쓰기 시작한지 3일째이자 입학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는 기한을 이틀 남겨놓은 시점이므로 그것을 핑계삼아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집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정도 크기의 술자리에서조차 나는 어색함과 붕 뜬듯한 거리감에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이므로 오히려 입학지원서가 아니라 그런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무의식적으로 싫어서 집으로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들어가면서 맥주 4캔---4캔을 한번에 사야 할인이 되고 또 어차피 그리 길지 않은 시일 내에 4캔 정도야 어렵지 않게 소진할 것을 알기 때문에 4캔이다---을 사가서 한 캔을 다 마셨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아마도 이 글을 읽게 될 자랑스러운 컴퓨터공학부 21학번 동기들을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좋아하고 그러나 어떠한 분위기 속에 끼어들어가있으면서 괜한 걱정 근심들이 피어오르는 것이 아무래도 괜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걱정 근심이 좀 덜 피어오르는 곳에 있고자 할 뿐이니 이 까다로운 작자에게 서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맥주를 마시면서는 곧장 입학지원서를 마저 쓰지 않고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왜 하필 지금 그 책을 읽느냐하면 첫째는 <노랑무늬영원>을 막 다 읽어서 더 이어서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다음으로 읽으려고 했던 알베르 까뮈의 <반항하는 인간>을 읽기에 앞서 처음 읽을 때는 미처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시지프 신화>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은 예엣날에 다시 읽겠다고 결심하고는 절반도 읽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던 전적이 있기에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겠다는 의지가 가장 충만하게 드는 책이었다.

<시지프 신화>의 첫번째 장은 자살하는 사람의 결정 과정을 논리적으로 되짚어보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지난 1년간 평균적인 현대인에 비해 또 근 4년간의 나에 비해 꽤 많은 활자를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그것을 지금 이렇게 자부할 수 있는 이유는 <시지프 신화>의 첫장을 읽는 것이 꽤 수월하고 심지어 그전에 읽었을 때보다 재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전에 두번째로 읽으면서는 외국어에 암적응된 번역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문장들이 이번에 읽을 때는 막힘 없이 읽히고 있었다. 아무튼 이건 쓸데없는 자랑이고 읽기 쉬웠다는 점보다 중요한 점은 읽기에 재미있었다는 점이었다. 까뮈의 문체는 이제보니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유쾌하게 비웃는 구석이 있었다. 몇 가지 구절을 인용해본다면,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 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면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을 본능적으로라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든 한 번쯤 스스로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을 터이므로 (...)

그는 자신의 첫 작품을 탈고하고 나서 그 작품에 대한 세인의 주목을 끌기 위하여 자살했다. 실제로 주목을 끌긴 했지만 그 책은 졸작으로 평가되었다.

이런 문장들에 나는 유쾌했다. 문장 자체가 유쾌한 건지, 맥주 한 잔에 덜컥 취해버리는 그러면서도 오늘따라 한 잔 걸치지 않고서는 안 된다고 느낀 나의 상태가 유쾌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것에서 유쾌함을 느낄 수 있는 상태는 입학지원서도 프로그램 합성 프로젝트 제안서도 완성되지 않아 모든 분초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던 어제 저녁이나 오늘 아침의 상태보다는 뭐랄까... 유쾌한 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유쾌한 문장들이 술술 써지는 상태는 최근에 겪은 적이 드문 최상의 상태다.

여러 가지 쓰기 싫었던 글들을 이런저런 언어 모델과의 상담을 통해 효과적으로 써내고는 한강의 소설도 마저 다 읽고나면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없게 살더라도 그 재미없음의 전체가 어떤 재미없는 농담처럼 시니컬한 재미를 자아내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미없더라도 무던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루하고 강인한 어떠한 삶의 명제를 증명하여 희망이나 삶의 의지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단편집의 마지막 단편에서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기묘한 이유---혹은 알 수 없으므로 이미지라고만 부르는 것이 적절한 듯한 그 어떤 것---에 말미암아 주인공에게 삶의 의지가 불어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버스의 하차벨을 눌렀는데 그러면서 한강을 흉내내 내 삶을 변명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썩 기분이 괜찮았던 것이다. 이상이 <노란무늬영원>을 다 읽은 데 대한 이것저것이 뒤섞인 감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의 나는 쾌지나 칭칭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