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요약: 밥솥 사서 너무 행복해요
(요즘 진짜 infp 다된듯.. 미친 감수성으로 장황하게 썼지만 밥솥 사서 너무 행복하다는 내용이다)
최근에 자취방에 새 식구를 들였다. 고려청자 같은 은은한 비취(bitch가아닙니다)색의 쿠쿠 밥솥이다. 귀엽고 동그란 자태에 홀린듯이 구매했고, 계속 들여다 봐도 사랑스러운 그런 밥솥이다.
식비를 아끼고 싶어 구매했는데, 과연 3천원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친구다. 이 밥솥으로 지은 밥과 함께 계란후라이, 김치, 취나물, 낙지젓갈 등등 여러가지 반찬으로 끼니를 하고 있다. 천식보다는 훨씬 맛있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6천원을 넘어가는 다른 학식보다도 훨씬 맛있는 것 같다. 밥솥 뽕에 차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은 사먹는 것보다도 맛있게 느껴진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흰쌀밥을 짓는다는 것, 그리고 밥을 먹고나서 바로 설거지를 한다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내 스스로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 같다.
이전에는 자취방을 기숙사처럼 여겼다. 잠만 자는 곳, 금방 떠날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집을 잠시 거쳐가는 손님일 뿐이라고 생각해서 물건을 많이 사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밥솥도 살 생각을 안했다. 햇반을 미워하면서도 그게 내 처지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므로..
누군가와 같이 식사할 땐 무엇보다 맛있는 걸 찾아내려고 노력하면서, 혼자 식사할 일이 생기면 대충 컵라면으로 떼우거나 끼니를 걸렀다. 혼자 맛있는 걸 먹으러 가거나 멀리 놀러가거나 여행을 떠나지 않았던 것도, 전부 나 자신만을 위해 (시간이든 돈이든) 투자하기를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맛있는 걸 먹이고 싶어하면서, 왜 내 자신을 위해서는 맛있는 걸 먹이지 않았을까?
그동안은 왜 플라스틱맛 나는 햇반을 먹으면서 살았을까. (햇반을 먹으며 살아온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거기에서 플라스틱 맛이 난다고 여기면서도 그게 나에게 어울리는 일이라고 느꼈던 게 문제다.)
이제는 오롯이 나만을 위해 쌀을 씻고, 안치고, 기다리고, 다 된 밥을 뜨고, 맛있게 퍼먹고, 사용한 용기들을 설거지한다. 그 행위를 할 때 "I deserve it" 같은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한국말 중에는 deserve와 같은 뜻의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받을 만하다'라는 말에는 '정량적으로 평가한 결과 받아도 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땅땅땅' 같은 어감이 묘하게 스며 있는 것 같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게 별 게 아니구나, 이런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살게 하는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플라스틱 맛 나는 햇반으로 대충 한끼를 떼우고, 밥을 먹은 다음 냅다 드러눕고는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도 설거지를 안하는 삶을 산다고 치자. 물론 그런다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죽고 싶어지지도 않을 것 같다. 그런대로 살아가겠지만, 그런 태도가 삶의 전반을 잠식하게 된다면? 그래도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지만, 깊은 마음 속으로는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될 것 같다.
헤르만 헤세의 <삶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행복이란 곧 사랑이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들 영혼 속에서 스스로 느끼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움직임이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것 그 자체라고, 그리고 사랑이란 살아있음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이야기한다. 진리와 미와 삶의 온전함이 위태로워지더라도 그 존재에 만족하려는 마음가짐이며, 성장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사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느끼고 활동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활동성이란 우리 안에 깃든 정신력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표현이며, 우리 안에 깃든 정신력이란 이성, 감정, 미의 감수성을 의미한다.
(여러 저서에 걸쳐서 대충 저런 생각이 담긴 온갖 이야기들을 전달하시는데, 내가 듣고 싶은대로 듣고 요약한 것이라 에리히 프롬 씨 생각이랑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최근에 여러 책이나 글을 읽다보니까 여기에 도달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생명을 느끼기로 하는 삶의 마음가짐이며 활동성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행위다.
나는 이 아이디어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사랑’이라는 말을 보면 흔히 연인 간의 사랑, 그리고 부모자식 간의 사랑, 신과의 사랑 정도가 먼저 떠오르지만,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끊임없이 스스로 살아있음을 감각하기로 하는 약속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나만을 위해 쌀을 씻는 순간. 쌀알의 오밀조밀한 감촉을 느낄 때 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삶의 전반에 걸쳐 유지하기로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
본문이랑은 크게 상관없이 노래를 하나 추천하고 가겠다.
줄이 그새 줄어들었네
나를 기다린 줄 알았던
사람들은 떠나가고 다시 우리 둘만 남았네
술이 가득한 눈으로 날 사랑한다 말했었지
슬프도록 과장된 네 모습도 뭐, 나쁘지 않은 걸
완벽하지 않아 기쁜 걸
내가 모자르는 만큼 너는 조금 모나있거든
새로운 사실이 아니어도 난 매번 새로워
아무렴 어때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지금 보니까 은근히 라임을 맞춘 것 같다…?)
이 노래에 관심이 간다면 이 노래도 들어주세요. Love is all에서 가사가 이어지는데 이렇게 세계관을 만들어주는 게 덕후(?)를 미치게 한다…
줄은 처음부터 없었네
나를 기다릴 줄 알았던 사람은 너 하나였는데
이제 난 혼자 남았네
술이 가득한 눈으로 날
미워한다 말 했었지
슬프도록 차가운 니 모습만
내 기억에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