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BGM: 10CM -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 ♩ ♪ ♫ ♬
오후 3시 반 전에 윗공대에 가게 되면 늘 같은 곳에서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주문한다.
언제부턴가 그건 내 삶의 낙이 되었고, 윗공대에 올라갈 이유가 되었다.
그분은 컵홀더 또는 뜨거운 라떼 위에 귀여운 캐릭터를 그려주신다.
“주문하신 바닐라 라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분의 일정한 목소리에도 안정감을 느낀다.
이제는 커피가 당길 때 시계를 본다. 아직 3시 반을 넘기지 않았다면 안도한다.
그분에게 커피를 받기 위하여, 어떤 때는 순전히 그 이유만으로 윗공대에 올라간다.
그곳에 들어가면 언제나 눈을 굴리며 그분을 찾는다.
내 마음에 불을 지핀 건, 매일 그분에게 커피를 건네받으며 스몰토크를 한다는 친구의 이야기였다.
왜 걔랑만 스몰토크 해주지? 왜 나랑은 안해주지? 나 정도면 단골 아니야? 나도 아시지 않을까?
굳어가던 스물네살의 낭만적인 마음이 유치한 생각들로 얼룩졌다.
올해까지만 일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치기 어린 열정이 샘솟았다.
그전까지 어떻게든 그 사람이랑 스몰토크하는 사이가 되고 말겠어!
그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말거야!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분께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을까, 대화를 길게 이어갈 껀덕지는 없을까.
그 친구에게 1시간, 다른 친구에게도 1시간, 지나가다 마주친 친구에게 30분씩.
그날은 종일 여기저기에서 그분 이야기만 했다.
♩ ♪ ♫ ♬ BGM: 박혜경 - 고백 ♩ ♪ ♫ ♬
오늘은 진짜로 말을 걸겠어!
랩미팅을 시작하던 1시, 랩미팅이 한창 진행 중이던 2시.
나는 내내 시계를 보며 그분을 찾아가도 된다는 허락—랩미팅의 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랩미팅이 끝난 2시 37분. 서둘러 교내순환셔틀을 잡아타고 윗공대에 올라가면서,
나는 차라리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스 바닐라라떼가 품절되었기를 바랐다.
왜 품절되었냐고 그 한마디를 묻고 대답을 듣고 싶어서.
역시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대신, 아이스 바닐라라떼와 함께 빵을 시키기로 했다.
키오스크 메뉴에는 ‘베이커리1500’이라는 이름으로만 표시된 빵.
여러가지 빵 중에서 어떤 것을 먹을지는 구두로 주문해야만 한다.
빵을 고르면서 뭔가 말을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저 빵은 고구마 파이로 주세요!”
그게 내가 한 말의 전부였다.
“네!”, “감사합니다!”, “빨대 여기에 있어요!” 이게 그분이 나에게 건네신 말의 전부였다.
내가 빨대를 뒤적거리다가 잘 빠지지 않아서 직접 꺼내주신 일들은 다 잊어버리신 건지.
달달한 커피에는 달달한 빵을 먹지 않는다는 나의 기존의 원칙은,
커피와 빵봉투를 들고 과방에 도착한 다음에야 떠올랐다.
손 안에 남은 건 달달한 고구마 파이가 든, 종이냄새 물씬한 봉투뿐.
오늘 먹은 아바라와 고구마 파이는 너무 달았지만 씁쓸했다.
언제나 일정해서 너무 좋아했던 바닐라라떼.
오늘은 라떼와 함께 말을 걸어보려던 용기를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흥, 친해지긴 뭘 친해져! 이제 말 걸려는 생각도 다시는 안할거야!
이젠 커피 사러 갔을 때 안계셔도 상관없어!
그 바닐라 라떼 아니어도 세상에 맛있는 바닐라 라떼 많거든?
커피가 커피 구실하면 됐지 라떼 아트가 무슨 필요야!
♩ ♪ ♫ ♬ BGM: 샵 -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 ♪ ♫ ♬
참 바보같은 일이었다.
내일이면 다시 그 바닐라라떼를 그리워할거면서, 그곳에 들어갈 때마다 두리번거릴거면서.
그분이 있는지, 컵홀더에는 그림이 없는지, 라떼아트는 안해주시는지 살필 거면서.
아이스 바닐라라떼를 그렇게나 좋아했으면서, 그 음료가 좋아서 꼭 그 카페에 가는 거라고 장담했으면서.
그 음료가 품절이라면 그곳에 갈 이유따위 없다고 친구에게 떠들어놓고서는.
달달한 커피에 달달한 빵을 같이 먹으면 입안이 너무 달아지니까 안 시킨다는 철칙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라떼아트를 받고 그것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려면,
얼죽아의 신념따위 포기하고 뜨거운 바닐라 라떼를 시켜볼까.
겨울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감성 한 스푼 로맨스 프레이밍 한 움큼 넣어서 쓴 이야기입니다.
다만 바리스타 분, 저랑 동성이신데, 저는 이성애자입니다..
뭐 이 점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서 본문에는 안넣었지만..
실제로 저를 아시는 분들께 오해가 있을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