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아꼈었다.
빌린 책은 당연히 아낀다. 그 책은 다음 사람도 만나야하니까. 모두와 만날 수 있도록 모두에게 동등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니까. 내가 빌릴 때와 돌려줄 때에 책의 상태는 같아야 한다. 밑줄을 긋거나 귀퉁이를 접거나 해서는 안된다.
내가 사서 갖게된 책도 아꼈었다. 방금 산 새 책의 깨끗한 상태를 언제까지고 지키고 싶었다. 마치 헌책방에 제값에 내놔도 될만큼 애지중지 아꼈었다. 책은 깨끗할 때 가장 명예롭다고 생각했나보다.
지난 학기에 <21세기한국소설의이해>라는 강의를 들었다. 많은 소설을 읽었는데 그중 내가 사서 읽은 것은 이승우의 장편소설 <지상의노래> 하나였다. 기말과제 비평에 쓰려고 사서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온전히 소설을 즐기려고 읽었고 그 다음에는 비평을 쓰기 위해 소설의 주제의식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분석하며 읽었다.
처음에 읽을 때도 비평을 의식하지 않지는 않았다. 중요한 문장이 있다면 기억해야하므로 밑줄을 긋기로 했다. 처음에는 순전히 내게 울림을 주는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그러나 두번째에는 내가 분석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힌트가 될만한 문장은 가능한 전부 모아야했다. 문장을 열심히 모으다보니 온 책에 밑줄이 그어질 것만 같았다. 결론적으로는 그냥 문장들을 노션에다가 적어놓기로 했다.
그런 경험이 내 안의 어떤 구속구를 풀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책에 펜(정확히는 연필)을 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그 뒤로 나는 책을 상처입히는 자가 되었다.
상처입히게 된 책으로 일단은 예전에 읽던 <시뮬라시옹>이 있다. 조낸 어렵고 쓸데없이 현란한 책인데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깊다고 하니 잘 이해해보고 싶어서 공책에 열심히 정리하며 읽었었다. 그러다 학기가 바빠져 유기하고 있다가 최근 종강을 하고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근데 이제는 노트에다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책에 바로 밑줄을 긋고 내 생각을 적어놓았다. 구속구가 풀렸으므로 더 효율적인 방식을 채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 책의 보존상태는 “하”가 될 것이다. 헌책으로서의 상품가치가 떨어졌다. 그러나 내게 있어 책의 가치는 올랐다. 책에 내가 새겨져 더 풍부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달에 구매한 한강 장편 <희랍어시간>도 내가 상처입힌 책이다. 간단히 말해 밑줄을 긋고 귀퉁이를 접은 책이다. 이 책은 아끼게 된다. 온 힘을 다해 읽고 싶다. 온 힘을 다해 읽을 때 문장에 새겨진 감정을 느끼며 때로는 푸하핫 웃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굵은 눈물을 주르륵 흘릴 수 있게 된다. 내가 아끼는 책이다. 동시에 상처입히게 되는 책이다.
지금은 완결됐지만 내가 아주 오랫동안 즐겨보던 한 웹툰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 사랑이란 서로를 상처입히는 일이라는. 앞뒤맥락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문장만이 뇌리에 깊이 남았다. 잠깐 찾아보니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라는 책도 있다고 한다.
책에 밑줄을 그을 수 있게 된 나를 바라보며 그 말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랑이란 상처입히는 일이라는 말이. 사랑이란 다시 말해 상대의 삶에 나를 영구적으로 혹은 적어도 반영구적으로 끼워넣고 나 또한 내 삶에 상대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 책을 사랑하는 일에 잔뜩 겁을 먹고 얼어붙어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른 이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고, 그 책이 “최상의 상태”를 지킬 수 있게, 그 책에 나를 남기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마침내 영원히 소장할 결심을 그 책들에게 한 것 같다. 책들을 상처입힐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상처로써 그 책들이 더 귀해질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여전히 책을 아낀다. 그러나 때로는 상처입힌다. 아끼기에, 언제까지나 아끼겠다고 맹세한 것처럼, 망설이지 않고 책을 상처입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