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해방연대 아지트

사용자 확인중...

일지 450호의 개정판

본문 보기

영수증으로 딱지를 접는 마음으로

언제인가, 일기는 너무 힘든 날에 차오르는 생각을 뱉어내기 위해 쓴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말로 행복한 날이라면 일기따위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래서인가 일기에 행복한 글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오늘은 떠나갈 듯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즐거운 날이었다. 즐거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칠 때 문득 일기가 쓰고 싶어졌다. 지금 드는 이런 생각들을 그대로 담아내기만 하면 행복한 일기가 만들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누군가가 쓴 행복한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다시 이 글을 찾아올 내 자신이 이걸 읽고 조금 더 즐거워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녁 식사로 봉골레 파스타를 먹었다. 동네 파스타집일 뿐인데 웨이팅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옆에 카레 집에 갔을 텐데, 오늘은 왠지 고집스럽게 굴고 싶었다. 오른손으로 포크를 돌려 몇 가닥의 면을 돌돌 감았다. 어떤 때는 깔끔하게 잘 말렸고, 어떤 때는 엉망진창 면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쳐 나왔다. 면발들이 포크를 둘러싸고 저마다 와글와글 엉켜 있었다. 숟가락과 포크를 양 손에 쥐고 껍데기를 쑤셔서 조갯살을 겨우 얻어냈다. 바다 맛이 났다.

나는 남들보다 손재주가 좋지 못하다. 대표적으로 젓가락질을 잘 못한다. 비슷한 현상으로는 집게질, 가위질도 잘 못한다. 숟가락질, 포크질마저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앞에 나열한 것들에 비하면 그럭저럭이다. 껍데기에 들러붙은 조갯살을 떼어내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봉골레 파스타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어렵게 얻은 것은 각별해진다. 어렵게 꺼낸 조갯살은 값지다. 남들보다 어렵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은 같은 성취에 더 많이 기뻐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다.

파스타를 먹고 나니까 딸기 케이크가 먹고 싶었다. 파스타 가격이 7500원이었는데, 동네 카페에서 파는 딸기 케이크 가격이 8000원이어서 고민하던 찰나에, 투썸 기프티콘이 떠올랐다. 생크림 딸기 케이크는 없었지만 복숭아 케이크는 있었다. 즉흥적으로 카페에 오는 바람에 가방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평소에는 노트북 충전할 콘센트가 있는지, 공부하기에 책상이 너무 낮지 않은지 따위를 신경 쓰느라 앉지 못했던 자리를 일부러 골랐다. 새로운 자리에서도 여느 때와 같이 영수증으로 딱지를 접었다.

딱지

누군가 종이학 백 마리를 접듯이 딱지를 잔뜩 접어 모으고 싶다. 나에게는 종이학 접기가 너무 어렵다. 딱지가 딱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딱지 접는 일을 참 좋아했다. 그땐 색종이 두 장으로 한 개의 딱지를 만들곤 했다. 딱지에 넣을 두 가지 색의 조합을 어떻게 이루는지에 따라 완성된 딱지에서 색다른 느낌을 낼 수 있었다. 딱지를 접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설레였다. 사용되는 종이의 성질에 따라, 접는 방법에 따라, 접히는 각에 따라 모든 딱지가 다르게 만들어진다.딱지는 완벽하지 못해도 그만, 손재주가 엉성해서 더 즐겁다. 엉망진창 제멋대로 접히고 삐져나오고 모자란 딱지들에게 나도 모르게 정이 든다.

오늘부터는 완성된 딱지들을 유리병 안에 모으기로 했다. 딱지의 한 모서리를 잘못 접는다고 해서 작품 전체가 망가지는 게 아니다. 딱 한 장의 딱지가 조금 삐뚤어질 뿐이다. 그마저도 모아놓고 멀리서 보면 알아차리기 어렵다. 조그만 흠과 잡티들이 전부, 멀어지면 희미해진다. 제멋대로 구는 못미덥기 짝이 없는 손이지만 오늘도 움직인다. 뭐라도 한다. 파스타면을 포크에 감는 마음으로, 가방도 없이 카페를 찾는 마음으로, 영수증으로 딱지를 접는 마음으로. 우연히 사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와 설렘으로, 예쁘지 않은 무언가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믿음으로. 그러면 텅 비어 있던 유리병 안에 딱지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와글와글 저들만의 이야기를 떠들게 된다.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