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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406호의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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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하게 무지한 자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더 도드라지는 일도 일어난다. 결과는 동기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동기는 결과를 제어하지 못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사실 그것들은 작업자의 내면에 서로 엉켜 있어서 따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한 경우가 더 많다. 작업자 자신도 내면에 있는 동기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 의도적으로 진짜 욕망을 감추고 다른 것을 앞세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자신 스스로 속는 경우가 더 많다. 예컨대 무슨 이유든 자신의 진짜 욕망이나 동기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거나 그렇게 하면 불리하다고 판단되어서 은폐하려고 할 때,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지 못하게 하려는 힘이 작동할 수 있다. 그는 기꺼이 모르는 편을 택하고 교묘하게 무지한 자가 된다.

-이승우, <<지상의 노래>>(2012), p.29.

"교묘하게 무지한 자가 된다"라는 말이 가끔 머릿속을 맴돈다. 정말? 정말로 몰랐을까? 나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한 것 아닌가? 나는 평생을 교묘하게 무지한 자로 살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