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학생운동의 끝물에 열정을 다하여 임하셨던 아버지 밑에서 언제나 (비록 한쪽의 목소리뿐이나) 정치 담론을 가까이 하며 각각의 사안에 내 개인의 철학적 정치적 사조를 시험받으면 자랐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당대의 뜨거운 참여 의식에 로망을 가진 것도 있으나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 대학교라는 가장 뜨거울 지식인 사회에 진입하면서 어떤 진지한 담론을, 솔직한 말로는 좌편향된 가정 바깥의 다양한 의견 교류의 장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로망을 가졌다.
그러나 캠퍼스에는 무섭도록 차가운 침묵만이 정치 담론을 막고 있었다. 우리는 기껏해야 피부에 직접 와닿아 일상을 박살내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일부 사안들, 이를테면 R&D 예산 삭감이나 전장연 지하철 농성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형식적으로 한마디씩 논평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젠가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어쩌다가 대화에 불쑥 튀어나왔을 때 “어허~ 그런 얘기 하는 자리 아닙니다”하는 반응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참담한 심정을 느끼면서도 그 심정을 애써 꾹꾹 눌러담고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답답해했다. 우리의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일상을 이룩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한 역사적 사건이 단지 의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는 이유로 일상 대화에서 꺼내서는 안 될 금지어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윤통이 마침내 일선을 넘어 위헌적 불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에 일말의 감사마저 느끼고 있다. 물론 일어나서는 안 될 초유의 사태였으나 한편으로는 꽝꽝 얼어있던 정치 담론이 마침내 녹아서 말랑말랑하게 봄을 맞이한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윤통의 그릇된 가치관과 결정과정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범위는 계엄사태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모든 실책과 (그러한 것이 있다면) 업적에까지 미치며 잠재적으로는 역대 대통령 및 국회의원, 기타 정치 주체들에까지 각자의 사조를 가지고 평가할 수 있게 된 분수령이다.
나는 2016년 박근혜 퇴진 집회 당시 그저 집과 학교를 오가며 아무런 행동도 결정도 하지 못한 것에 풀리지 않는 죄책, 그리고 그 역사의 현장에 나갈 수 없었던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마침내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소집한 전체학생총회에 응하여 현 사태에 대한 학우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나 또한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하는 거대한 의지에 동참하며 한 명의 시민으로서의 의견을 표했다는 것에 대단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한명의 시민 그리고 한명의 대학생으로서 정치적 현장에 참여해 주권을 행사해보고 싶었던 하나의 꿈이 오늘 이루어졌다. 지구멸망 리스트를 스스로 오마주하여 졸업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인 졸업 리스트에, 한 줄을 그을 수 있게 됐다.
사회에 팽배한 “중립주의” 사관에도 한마디를 남기지 않을 수 없는 기분이다. 어느 누구도 한 사안에 대해 완벽히 중립적일 수는 없다. 만약 완벽하고 기계적인 중립을 지킨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그가 인지할 수 있는 양 끝의 가운데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에 그 사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건전한 시민은 어느 한 지점의 의견을 지지하게 되기 마련이고 그것은 난립하는 여러 의견 가운데에서 언제나 특정한 방향성으로 차별화되는 한 의견이다. 의견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기계적 중립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다양한 의견이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의무과 부과된 것이 아닌 이상에야 기만이거나, 자기 기만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사안에 대한 무관심이다.
민주공화정의 무서운 점은 사안에 대해 뚜렷한 의견을 갖는 사람뿐만 아니라 의견을 내지 않거나 의견이 없는 사람조차 어느 하나의 의견으로 해석되어 집행된다는 점이다. 선거에서 표를 행사하지 않으면 사안에 특별한 이해가 있는 사람들이 유효한 표를 행사하여 어떠한 불평등과 부조리를 만들어내더라도, 그 불참자는 불참여의 죄로 인해 그러한 모든 부조리를 마주하면서도 그것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평과 호소의 명분을 잃은 채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관심자는 그 무관심이 사회적 부조리가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묵묵히 맞을 수 밖에 없으며 양비론으로 정치에 불참한 자는 그가 비관한 양쪽의 부조리를 맞으면서도 특별한 변혁의 의지 없이 다시 양비론에 침잠하여 죽어간다.
오늘 열린 전체학생총회, 그리고 그곳에서 오간 담론에 대하여 다시 여러 이야기가 오간다. 아마도 학생총회에 간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가 초유의 계엄령에 화들짝 놀라 참여를 결심한 사람들과, 지금까지 보아온 대통령의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들에 갖고 있던 불만을 마침내 터뜨릴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섞여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윤통의 계엄 이전까지의 행보에 대해서는 “중립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퇴진 혹은 탄핵 이후에 민주당이 의석 및 대통령을 독식하는 상황을 걱정하는 사람들일테다.
나의 의견은 이렇다. 첫째로, 윤석열이 퇴진해야 하는 사유로 계엄만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계엄은 물론 그 자체로도 경악할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비상식적인 행보가 결국에 계엄까지 이어졌음을 생각하면 작금의 퇴진 요구는 계엄 이전까지의 전 임기의 맥락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완전한 논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맥락을 무시한 채 헌법정신에 명백히 어긋나는 계엄 한가지만을 논해야한다는 주장은 그 이전 행보에 대한 판단을 기계적 중립에 매몰되어 보류하려한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고까지 할만하다.
둘째로, 전체학생총회에서 윤석열 퇴진 이후 생겨날 민주당 독식 체제에 대한 우려를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 “중립적”인 근거는 이렇다. 현재는 윤석열의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정지하는 것에 온힘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그 이후에 대한 고민도 이루어져야 하지만, 최종적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냉철한 이성이라든지 정확한 논리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신념을 자극하여 설득해내는 퍼포먼스와 수사학이다. 이 지극히 현재적이고 시급한 상황에는 때를 맞추어 파도를 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언제나 때와 상황에 맞추어 이야기해야 그 말은 힘을 갖는다. 윤석열의 퇴진과 그 이후의 정치 상황적 구도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논의를 해야할 시점은 엄격하게 구분된다.
다소 중립적이지 않은 근거는 이렇다. 민주당 독식 체제는 물론 잠재적 위험을 갖고 있지만 그 체제 자체가 민의의 표출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당은 앞으로도 압도적 의석수로써 서슴없는 정치행동을 이어나가겠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국민이 다수결로써 입법부에 요구한 행동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리에는 기계적으로 우민정치라는 비판이 따른다. 나는 우민정치라는 개념 자체에 강력히 반론한다. 우민은 어떤 이상에 빗대어 민중이 아리석다고 여기는 말인데, 정치체제에 있어 절대적 이상이란 없다. 세상에 단 하나의 완벽한 체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민주주의에서 유일하게 따를 수 있는 진리는 국민의 뜻뿐이다. 소수의 엘리트나 한명의 철인이 어떤 이상을 펼치고자 한다고 해도 그것이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면 그 이상은 그들만의 이상이다. 여러 대안체제들 사이에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고 하나의 완벽한 체제는 없다. 그 대안체제들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올바른 과정은 국민들의 뜻을 수렴하여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방식이다. 어떤 거룩한 계시를 받아 그가 상상하는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철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이상은 국민의 뜻을 무시하는 순간 개인의 망상과 구분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에는 자정 기능이 있다. 국민들이 맑은 정신으로 정확한 정보에 근거하는한 민주주의는 국가를 다수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합의점으로 이끈다. 내 생각에 진보 진영의 한가지 정당성은 바로 이 지점이다. 민주당이 집권하는 동안에는 언론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윤석열의 심각한 폭거 가운데 하나가 언론 탄압이었음을 생각하면 매우 대조되는 지점이다. 언론은 진보정권에서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채 진실만을 전달한다는 사명 아래 제 기능을 다한다. 언론마다 저마다가 생각하는 “진실”을 설파하는 것이지만 유일한 진실이 없는 이상 그 충돌이야말로 합의된 진실을 찾아가는 건강한 동역학이다. 물론 민주당의 정책에도 여러 문제가 있고 보수 진영이 더 설득력을 갖고 해결할 수 있는 사안들도 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일순위로 수호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나는 언제나 진보의 편을 들 수 밖에 없다.
다당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나도 물론 다당제를 원한다. 원하고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길은 다소 험하다고 생각된다. 국회의원 총선거 등에서 다당제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고자 제삼지대의 지역구 후보에 투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민주당 후보에 투표하는 편이다. 제삼지대에 투표하는 것으로는 실질적으로 다당제를 이끌어낼 수 없다. 의견 표명보다 중요한 것은 일단 결과로 나오는 체제를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여기에서만큼은 목적지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맞다. 정치는 오로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고, 그 미래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종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표가 분산되면 보수 후보가 당선된다. 아주 높은 확률로 1번과 2번 중에서 당선이 된다면 1번과 2번 중에서 더 바람직한 것을 밀어야지 당선되지도 않을 제삼시대를 자기 의견 표출을 위해 뽑는 것은 옳지 않다. 진정 다당제를 원한다면 차라리 비례대표를 재삼지대에 투표하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한다. 실제로 난 그렇게 한다.
이런 느낌으로 정치 얘기를 잔뜩 해보았다. 학생총회의 열기와 맥주 한잔의 채 가시지 않은 취기가 남은 채로 새벽에 마구 써내려갔다.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정치 이야기는 자주 쓰지 않으려고 한다. 쓰더라도 다른 주제에 묻어 유머러스하게 넣는 정도. 아지트에는 이야기할거리가 너무 많다. 정치는 언제나 자신의 중요성을 부풀리며 모든 담론을 잡아먹으려고 한다. 또 정치는 특히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고 서로에게 불쾌감을 일으키는 영역이다. 나는 아지트가 유쾌감을 일으키는 곳이었으면 한다. 정치 이야기는 역시 잘 분리해서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학생총회 다녀온 사진들을 풀어본다.
아래는 윗공대에서 모여 학생총회가 열리는 아크로폴리스로 이동하는 장면. 거의 시가행진과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총회 이후의 시가행진은 (춥기도 하니까) 아쉬움없이 슬쩍 빠졌다.
아래는 총회에서 배부된 의안지. 저 의안지에 대해 찬성 반대 기권 중 하나로 투표한다.
아래는 끝날 때쯤 비가 내려 우산을 편 모습이다. 진짜 추웠다..
집에 와서 유튜브를 보니 YTN에 나와 동기 친구들의 모습이 찍혔다. 나 테레비 나왔어~ 맨 오른쪽의 깃발 바로 밑의 친구와 그 왼쪽에 회색 목도리를 두른 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