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서울대학교에서 처음 느끼는 감정 중 가장 흔한 것을 뽑으면 좌절감일 것이다. 일반적인 고등학교에서 적당히 잘하고 적당히 운 좋게 들어온 나 같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대학교의 강의 내용의 수준은 따라가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어려웠다. 이 생각을 1학년 때 이미 하기 시작했고 이는 나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비관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어려운 강의 내용만큼 힘들었던 것은 동기들과의 수준 차이다. 집단 뒤로 뒤쳐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좌절감을 주었다. 나랑 비슷한 시간을 살았을 사람들보다 압도적인 수준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니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을 정도이다. 내가 어려워서 밤새 고민하는 문제를 누구는 너무도 쉽게 해결하고 누구는 문제라고 인지하지 않는 정도... 그 정도의 수준 차이를 느낀 시점에는 그 강의에서 학업 의지를 잃어버렸던 것 같다. 아무리 해도 저런 사람들처럼 될 수 없을 것 같은,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인 벽을 느껴버린 것이다. 천재들만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나에게는 힘들다. 부정적인 생각은 머릿속에서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 '해도 안 된다' 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해야 할 것도 하지 않게 되고 이로 인해 더 큰 격차를 만들어내며 뒤쳐지면 앞서 자리 잡은 생각은 단단히 뿌리내릴 준비를 한다. 결국 남들에 비해 더 옅은 밀도의 시간을 살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일주일 같은 하루를 보낼 때 나는 하루 같은 일주일을 보낸다. 시덥잖은 일만 하면서 시간을 태워 없애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낭비를 하는 것이다. 한심한 사람이 되어가는 중인 것 같다.
나는 남들에게 보여줄 장기도 없고 키가 크지도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특출나게 똑똑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내 외형을 보이는 것이 무섭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는 것은 더 무섭다. 그래서 친구들이랑 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적이 잘 없다. 항상 의미 없는, 실 없는 대화만 이어나가려고 그리고 재밌는 대화인 척 꾸미려고 노력할 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틱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위와 같은 생각에 근거를 하나 더 추가해준다. 어렸을 때부터 틱으로 놀림을 많이 받았는데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밖에는 없다. 나는 사람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데 항상 나를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좌절감, 추한 겉모습, 어둡고 강하지 않은 내면을 가진 사람이 우등하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열등감은 나의 주된 감정 중 하나다. 그리고 그런 열등함을 숨기려고 해도 더 티가 나서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멋을 부린다거나 공부를 한다거나 그런 행동들도 열등한 나의 본질을 숨기려는 행동으로 인식하게 된다. 남들의 칭찬에는 항상 의심을 가지게 되고 반대로 질책은 너무 쉽게 수용해버린다. 이를 알면서도 고칠 수가 없다. 내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가 없다. 옛날 만화 주인공처럼 마음 속 깊이 진실되고 정의롭고 자신감 있는 이상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이 있다. 나한테도 배울 점이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취미도 없고 추구하는 가치도 없는 알맹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 같다.
살면서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해보거나 누군가 때문에 죽도록 힘든 경험은 해본 적이 없다. 항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왔다. 온전히 자기 힘만으로 사는 사람이 어딨겠냐만은 나는 유독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산 것 같다. 나랑 얘기해 주고 놀아주는 친구들도 고맙고 항상 도와주시는 부모님도 고맙다. 나 같은 것도 좋아해준다는 여자친구도 고맙다. 그런데 나는 괘씸하게도 이런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왜 나랑 얘기해주고 왜 나를 도와주고 왜 나를 좋아해주는지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면서도 내 마음대로 선을 그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한 관계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아무 문제 없이 지냈을 것이다. 아들로서도, 친구로서도, 그리고 연인으로서도 내가 아니었어도 똑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부모님에 대해서는 이런 류의 생각을 많이 했다. 나랑 부모님은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나에게 자주 애정 어린 말씀들을 전해주시지만 나는 그런 말들도 부모로서의 의무감에서 나온 말일까 의심해버리고 만다. 정말 너무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