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시험이 끝났다. 이제 과제를 최소 2번 제출하면 학기가 끝난다. 최대로는 31번까지 제출할 수 있다. 조교를 약간 귀찮게 한다면 귀찮게 하고 싶은 만큼 더 낼 수도 있다. 여하튼 어떤 것이 끝났다. 여하튼이라는 말은 하여튼의 말장난 같다.
시험-끝-남을 기념하여 예전에 보다 말았던 웹툰을 하나 보았다. 제목에도 적혀있는 <합법해적 파르페>이다. 몽환적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개연성과 핍진성, 구체성을 갖춘 몽환적 세계이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인물과 서사보다도 세계관 내지는 설정이 흥미로운 경우가 있다. 그냥 세계라고 하고 싶지만 일반적으로 이 맥락에는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쓴다. 독자-세계 전단사론은 나만 믿는 세계관이니까 어쩔 수 없다. 추가로 이야기에는 연출이라는 요소도 있다. 매체에 관계없이 연출은 있다. 어떤 사건을 이야기로 만들고자 한다면 디제시스적 세계에서 초점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즘은 영화를 보더라도 인물, 서사와 더불어 연출도 열심히 눈여겨보려 한다. 세계(관)는 말초적 흥미를 끌지만 너무 말초적이라서 일부러 관심의 가중치를 줄이게 된다. 아무리 세세한 설정을 붙인들 디제시스적 세계의 무한한 사건들 사이에서 아주 일부분의 유한한 관계성만을 가져올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창작을 할 때는 서사, 인물, 연출보다는 세계를 구성하는 데에서 시작하게 된다. 학부 3학년을 수료하며 이 세계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나보다. 감히 새 세계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그 또한 마법사가 되기 위한 한 걸음이겠지.
핍진성이라는 말은 나무위키랑 모 친구가 하는 것밖에 들은 바 없다. 마치 과학혁명의 구조의 서문에 나오는 "그 말을 실제로 쓰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같은 느낌이다. 이 말은 소개팅 자리에서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쓰는 남성에게 여성이 한 것이라고 한다. 핍진성은 이야기 내부의 무모순성을 일컫는다. 핍진성을 논하는 순간,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감수한 비합리성을 일부러 드러내어 욕보이는 것 같다. 흔히 볼 수 있는 인터넷 세상 특유의 악의성이다. 나는 그 악의를 싫어한다. 이미 모순으로 가득차있는 <사랑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버린 입장에서 '핍진성이 떨어져서 싫다'는 것은 텍스트를 즐기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작가가 쓴 것이다. 기독교가 생각하는 성경처럼 전지전능한 누군가에 의해 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세계에서 이야기를 발견하여 혼신을 다해 재미있도록 연출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재미없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야기임을 인식하면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어떤 이세계의 사건을 바라보며 즐길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하며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쓴다면 어떤 텍스트든 즐길 수 있다. 이야기는 독자가 완성한다. 개인의 주관에 따라 더 즐거운 것이 된다.
이제는 <합법해적 파르페>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그 특유의 정신 나간 세계관과 인물 때문에 재미있게 보았던 작품이다. 그러다가 작중의 결혼관이 너무 낯설어서 보기를 그만두었었다. 주인공이란 인물이 "결혼은 중복이 안 되는 거였나"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인물들 성별이 모호하기도 해서 진한 페미니즘의 냄새가 났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인물이 성별이 없는 암석인 <보석의 나라>를 보고 나니 그런 세계도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작가가 지뢰찾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갑자기 극 호감이 되었다. 인물들 성격이 성실하기도 하고 작가의 말도 미친 사람처럼 써서 호감이다. 아주 평온하고 대가리가 꽃밭으로 가득한 미침이다. 어느 노래에 "미친 사람들만이 하늘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말한다"는 가사가 있는데 그러 느낌의 미침이다. 원문은 영어인데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나사가 빠져있는 부분들이 왜인지 공감이 가서 좋다. 조금 오만하게 말하자면 만화 너머로 작가가 보이는듯한 느낌이다.
하나 예를 들면, 주인공 파르페가 합법해적에 붙잡혀서 강제로 불공정 노동계약을 맺게 되는데, 파르페는 거기서 어느 동화가 떠올라서 그 안에서 친구를 만들어보겠다고 끙끙 고민한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계약은 거짓이었고 선장은 얘가 울고불고 빌면 돌려보내고 막 대들면 정식으로 고용을 제안하려고 했는데 예상외로 조용했더라는 것이다. 마치 교수들은 질문이든 문의든 좀 하라고 하는데 절대 질문 안하고 혼자서 문제에 대해 찾아보고 고민해서 납득을 해버리는 내 모습을 보는듯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별로 나사가 빠진 건 아니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이상하지만 본인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달까.... 이상한 사람들에게도 그들 스스로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사람을 괴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의 악의적인 사람들은 괴물을 만들고 두들겨 패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정말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