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렸다 싶으면 떠올라 들어오는 이 공간, 그사이 수많은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 꽤 큰 책더미를 이루었건만 그 안에 내가 쓴 종이는 한 장도 없다. 뭔가, 나의 첫 장을 저 글더미 위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간단하게 신고식을 올린다.
종종 홀로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머릿속에 한 폭의 선명한 그림이 그려질 때가 있다. 그 때가 내게 있어 가장 깔끔한 형태로 생각이 정리된 때이다. 아쉽게도 내 손은 머릿속을 떠도는 그림 조각을 현실에 구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재주가 부족하기에, 앞으로 문자의 힘을 빌려 최대한 비슷하게 이곳에 두서 없이 늘어놓아보고자 한다.
오늘 그려진 그림은 맞물려 돌아가는 수없이 많은 톱니바퀴들이다. 뜬금없이 이게 뭔 소리냐 싶겠지만, 의식의 흐름 속에 쫘라락 재생되는 내 일상 생활과 인간 관계를 문득 클레이 뭉치듯 한 곳에 모아 하나의 구슬로 만들면, 그 구슬은 여러 가지 주기로 반복되는 내 삶의 시기, 규칙, 특징들을 비추어 준다. 이들을 하나로 통합할 단어를 한국 언어 체계에서는 찾지 못했기에, 반복되는 각 개체를 '톱니바퀴'라고 하자.
삶의 모든 반복되는 것들을 표현하기 가장 적절한 것이 톱니바퀴들이 아닐까 싶다. 각 톱니바퀴는 톱니끼리 맞물려 돌아간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또한, 톱니바퀴의 크기와 톱니의 개수는 제각기 다르다. 어떤 건 하루 주기로, 어떤 건 한 달 주기로, 어떤 건 10년 주기로 반복되듯이. 크기의 다양성과 밀접한 관계, 이 핵심 두 가지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무한히 맞물린 다양한 크기의 톱니바퀴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가는 그들을 통해 내 자신은 마치 기계 장치처럼 동력을 얻는다.
갑자기 이런 그림이 왜 그러졌냐 묻는다면, 오늘 10년 주기로 돌아가는 한 톱니바퀴의 존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대인관계의 경향성을 좀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놀라울 정도로 10년 전의 나와 거의 같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 그 때 내 주변의 사람들과 지금 내 주변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또한, 10년 동안 내 관계도의 모양은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해 왔다. 그런데, 그 관계도를 다시 펼쳐 보니, 사람들은 달라졌을지언정 사람들을 잇는 가지의 모양은 10년 전 한 시점에 머릿속에 찍은 모양과 거의 똑같았다. 이게 내게 큰 자극으로 다가왔나 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직접, 더 자세히 들으면 뭐라고 생각할까 참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에 따로 풀어봐야지.
10년 주기의 큰 톱니바퀴뿐만 아니라, 수많은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나를 완성한다. 맨날 중간쯤부터 시간에 쫓겨 과제하는 반 년마다 반복하는 학기 중 내 모습부터, 약을 먹는 매일의 내 모습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듯 반복되는 것들을 한 곳에 모으니, 톱니바퀴로 가득한 한 폭의 그림이 가상의 캔버스에 그려진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반복될 것이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지금의 내 모든 모습이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올 것이라는 의미 아닐까. 물론 지금의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 내게 다시 찾아오는 주기는 모두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각 조각에 대해 그 주기를 깨닫는 날이 온다면, 괜히 오늘처럼 신기해하고 뿌듯해할 것 같다.
근데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아무리 머릿속에 특별하고 당연하지 않은 생각이 가득하다 한들, 대수의 법칙에 의해 수많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한곳에 모으면 당연한 결론이 나오게 될 것이다. 다양한 생각을 한 곳에 모아 그린 그림이 당연한 그림이 아니라면, 그건 나보고 지금 당장 그 그림을 따라 무엇인가 시도하라는 암시일 것이다. 난 오늘도 그런 암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가상의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