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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269호의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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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갈아엎어!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이 아니었다

최근에 만화 카페 가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혼자 가보기 무서워서 안 가다가 한번 가보고 나니 꽤 즐기게 됐다. 처음엔 무슨 만화를 볼까 하다가 이치카와 하루코의 <보석의 나라>를 보기 시작했다. 굿즈를 보석으로 만들어서 뒤지게 비싸다는 그 만화다. 1권을 책장에서 꺼낼 때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애니메이션 1기를 보고는 "2기는 영영 안 나오는구나!"라는 생각에 골랐을테다.

애니메이션은 아름다운 3D 렌더링이다. 특히 보석이라는 소재의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재질을 예쁘게 잘 그렸다. 기술적으로는 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의 웨이드와 비슷한 느낌이다. 앰버 옆에 있을 때의 일렁이는 그림자가 인상적인데 <보석의 나라>에서는 그런 질감이 러닝타임 내내 렌더링되고 있다. 이거 쓰면서 엘리멘탈 스틸컷을 찾아보니 기억만큼 예쁜 장면이 없어서 생략.... 보석의 나라는 내 기억대로 장면마다 반짝반짝하다. 그야말로 3D 애니메이션의 올바른 활용이다.

  • 찰랑찰랑~

영상미도 좋고 이야기의 분위기도 아주 아련한 것이 자꾸만 빠져들게 된다. 끝없는 바다와 아슬아슬하게 떠있는 황량한 섬 하나, 그 위에서 수백년을 지내면서 달에서 침략해오는 월인과 싸우는 보석들. 그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포스포필라이트'(이하 포스)는 재질이 물러서 잘 깨지고 그걸 커버할 싸우는 기술도 없고 그 외에 내세울만한 특기도 없는 무능 그 자체인 보석이다. 굳이 말하자면 보석의 나라에서 귀여움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본인은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보석들의 지도자 격인 '금강'은 포스가 맡을 역할로 박물지를 기록하는 일을 준다. 포스도 할 수 있는 일을 기껏 찾아줬건만 정작 당사자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어서 밥...은 먹지 않는 보석들이지만 어쨌든 밥만 축내는 모습이 짜증나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어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다 포스는 양 다리를 잃어버린다. 보석들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몸이 산산조각나도 모아서 금방 붙일 수가 있지만 아예 잃어버리고 오니 난처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포스는 없어진 다리 대신 붙일만한 다른 소재를 잘 찾아온다. 새 소재는 유능하다. 새로 붙인 다리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빠르다. 이젠 좀 쓸만한 인재가 됐다.

  • 녹색 머리가 포스. 새로 붙인 다리가 아방가르드하다.

하지만 무서운 일이다. 보석은 깨진 부분을 잃어버리면 그에 비례하여 기억도 잃어버린다. 참 의미심장하다. 기억은 잃는다함은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결과적으로는 포스의 능력이 개발되어 할 수 있는 일,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보면 '더 나은' 정체성을 갖추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파괴는 곧 변화다. 변화는 곧 성장의 기회다. 기존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은 성장의 방법론으로써 효과적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고 변화시켜 모든 부분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 애초에 훌륭하다는 건 무엇인가. 기존의 자신은 그렇게 전면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만큼 못난 사람이었나. 지독한 자기혐오의 감정에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버림으로써 성장한다는 게 어딘지 서글프다.

<보석의 나라>에서 보여주는 신체훼손의 이미지는 이러한 정체성 파괴의 공포를 더욱 자극한다. 포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런 자기파괴적 성장을 반복한다. 겨울이면 바다에는 유빙이 떠다닌다. 유빙도 나름 보석과 같은 결정체로써 목소리를 낸다. 자아를 가지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대신 유빙은 들여다보는 이의 불안을 반사한다.

다리가 교체된 포스는 유빙을 들여다보면서 "다리처럼 손도 잘라서 바꿀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한다. 포스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지만 유빙의 목소리는 "그래도 강해질 수 있는걸? 뜯어줄게. 어떻게든 될거야. 이대로는 늦을텐데." 라며 속삭인다. 포스는 손을 뻗다가 멈추지만 곧 뒤로 미끄러져 넘어지고 두 팔을 잃어버린다. 결국은 또다시 새로운 팔과 능력을 얻는 결말이다. 그걸 보면서는 참 복잡한 심정이다. 정말로 자기파괴는 효과적이지 않은가.

긴가민가하면서도 난 포스를 응원했다. 그렇게라도 성장해서 즐겁게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런 성장은 너무도 공포스럽지만 어떤 일에는 용기도 필요한 법이니까. 포스가 그것으로 성공적으로 자라난다면 나도 용기내어 도전해볼 법한 일이다.

그런데 만화책으로 읽은 결말은 실망스럽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최대한 중요한 스포일러 없이 이야기해본다. 후반부로 갈수록 포스는 원래의 자신을 점점 더 잃어간다. 초반의 명랑하고 귀엽고 긍정적인 포스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금강과 월인에 대한 진실을 찾고 오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싸움을 이어나가지만 그럴수록 다른 보석들과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포스는 제정신을 잃어간다. 괴물이 된 포스를 위해 눈물 흘리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정말 실망스럽다. 화가 날 정도이다. 결국 포스의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묻게 되지만 그 답이 결말에 대놓고 드러나있다는 게, 다른 모두를 구하기 위해 자아를 상실한 괴물로 성장한 것이라는 그 납득할 수 없는 답을 내놓고는 만화가 끝나버린다는 게 더욱더 화가 난다.

난 그런 식의 결말은 인정할 수가 없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다. 난 단지 포스가 자신의 자리를 찾고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처음의 그런 귀여운 모습을 그려놓고는 이런 식으로 모든 부조리를 홀로 감내하라는 결말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래서는 성장이고 파괴고 다 의미가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이 아니네? 완결 났다길래 단행본이 다 나온줄 알았다. 나무위키 보니까 모르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렇게 된 이상 다 보고 와야겠다. 역시 그 정도로 미친 작가는 아닌가... 싱거워졌다.

아무튼 그림이 예쁜 재밌는 만화다. 결말은 봐야 알겠지만 일단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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