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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169호의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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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공대생 만화

집 안을 서성이며 생각을 하던 중 책장에 꽂혀 있는 "야밤의 공대생 만화"라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중학생이던 시절 부모님께서 선물로 사 주셨던 책입니다. 그 시절에도 여전히 컴퓨터 쪽 진로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취향에 맞는 과학 만화를 보고 재미를 가져보라는 의도가 담긴 선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진짜로 공대생이 된 지금 책을 펼쳐 일부분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공대생 만화라고 해서 정말 공대 전공이랑 관련된 내용만 나오는 건 아니고, 수학이나 물리학 등 이과 전반의 분야를 주 토픽으로 삼습니다. 유명한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너드 느낌 풀풀 풍기는 썰이나, 소소한 과학사 상식을 설명하는 짤막한 만화들이 수십 편 엮여져 있어 가볍게 읽기 좋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흐뭇해지기도 하고, 오래 전에 알았다가 까먹어버린 내용들을 마주하면서 새롭게 기억해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문득 학창 시절의 꿈과 장래 희망은 주변의 영향을 받아 쉽게 바뀐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대생 만화를 보고 공대생이 되어버린 내가 만약 중학생 때 저 책이 아닌 다른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게 됩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 "야밤의 공대생 만화"가 아니고 "곧 죽어도 힙합"이나 "절대 막히지 않는 웹소설 작법" 같은 책이었다면, 저는 지금 상수동의 한 작업실에서 lo-fi 비트를 찍고 있거나 환생했더니 슬라임이 되어버린 용사의 심리를 밤새도록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편 또 누군가에겐 "야밤의 공대생 만화"가 진로 선택의 전환점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 장래 희망을 적어서 내는 수업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대통령, 가수, 아이돌 같은 멋져 보이는 직업을 선택했었습니다. 요즘은 유튜버가 초등학생들 1위 선호 직업이라는데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합니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꿈을 꾸기 시작해서, 멋있어보이는 다른 직업들을 보면서 새로운 꿈을 갖기도 하고, 그렇게 자라다 보면 어찌저찌 진로가 정해져서 각자의 길에 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삶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지면서도, 결국 나에게 주어지는 한정된 경험 안에서 인생이 결정된다는 느낌이 들어 암울하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책 속에서 토마스 영 아저씨가 이중 슬릿을 들고 그만 자라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밤 꾸는 꿈에서는, 어렸을 때 나를 스쳐 지나갔던 꿈들을 모두 이룬 내 모습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