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하나둘은둘셋하나는 내가 꼭 챙겨보는 아마추어 SF 만화가이다. 오늘은 잠 오지 않는 새벽을 맞이하여 그의 (아마) 첫 작품 <멋진 우주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작품은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구에서 폭탄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되어 저 먼 우주로 3000년의 항해 겸 유배를 하게 된 허황과 그 우주선의 전반을 총괄하는 인공지능 로봇 이나영이다. 허황을 비롯한 수백명의 승무원들은 긴 항해동안 교대로 동면에 든다. 삶에 그다지 미련이 없는 허황은 첫 동면에 자원했다. 300년 뒤 잠에서 깨어나보니 거대한 우주선에는 사람 한명 보이지 않고 관리 로봇도 이나영 하나 뿐이다. 허황이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허황은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지만 외롭고도 지루한 항해 속에 자꾸만 들러붙는 이나영과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셋하나어쩌고의 만화는 대체로 불친절하다. 나레이션도 없고, 설정 소개 코너도 없고, 그러면서도 초미래 첨단 기술과 극단적인 부조리의 미래사회를 일상처럼 깔아놓는다. 거기다가 거칠디 거친 그림체와 현학적인 대사, 가상서적의 인용으로 그저 읽는 것도 힘이 든다.
그럼에도 재미와 감동이 있다. 공상과학 기술과 그럴듯한 미래 정치사에는 장르적인 재미가 있다. 그 무대가 한반도이고 많은 인물이 한국 이름인 것도 친근하고 현실감을 주는 포인트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SF나 판타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미래 첨단기술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잘 없지 않나 싶다. 흥미진진한 사이버펑크 세계에 익숙한 언어와 생활상이 보이는 재미가 있다. 심우주 항해를 준비하는 우주선에서 인터넷이 끊기기 전에 옛날 예능들을 내려받는다든지 반투명 전자 패드로 별에서온그대를 보고 있다든지 하는 허황의 모습은 일본이나 미국에서 주로 만드는 SF에서는 볼 수 없을 모습이다. 당장에 우주선 주 인격 이름도 이나영인 게 아주 친숙하다.
감동의 요소는 사실 처음에 볼 때는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난 한 해 사이에 교양도 듣고 영화도 여러 편 보고 INFP로 셀프 가스라이팅도 하면서 감수성을 좀 기르게 되어 오늘 새벽에 다시 보면서는 감동할만한 점을 찾아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불안이 가시는 것은 물론 발랄한 이나영 씨가 자꾸 앵겨붙는 게 귀여운 탓도 있을테다. 다만 좀 더 진지하고 근엄하게 분석을 해보자면, 너무나도 차갑기만 한 세상에서 아주 조그마한 의외의 따듯함이 큰 힘이 되는 것에 위로를 받는구나 싶다. 취업난, 전쟁, 태양이 사라진 하늘, 우주 유배, 홀로 생존,… 개같은 세상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살다가 겨우 안정을 찾은 곳이 주변 수백 광년 내에 사람 하나 없는 아광속 우주선 안이라니. 그 안에서 이미 자포자기해 그다지 슬퍼하지도 않는 허황의 모습이 더 쓸쓸해보인다. 그에게 기대도 안한 인공지능 로봇이 허황보다도 더 사람 같이 말을 걸어온다. 허황도 처음에는 이나영을 시리나 빅스비처럼 대한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친구, 동료, 동반자가 되어간다. 가장 차가울 인물이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따듯하고 인간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아이러니가 어떤 기적처럼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터미네이터에서 인공지능이란 낯설고 두려운 존재, 소위 괴물로 묘사된다. 셋하나뭐시기의 만화에서는 이나영 같은 로봇들을 인간과 묶어 ‘인격’이라 부른다. 다른 존재에 대한 포용과 인정이 느껴지는 호칭이지 않은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인 채이리라는 기대도 담겨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따듯한 마음을 가진 채일 것이다. 성격이 메말라버린 허황도, 금속질로 이루어진 이나영도, 안에는 똑같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마음이 들어있다. 지금처럼 서로 싸우고 속이고 등지는 일도 있겠지만 대화하고 알아가고 신뢰를 쌓는 모습도 있다. 그것이 수백년 후의 미래든, 수백광년 밖의 우주든 말이다. 자꾸만 각박해지는 최근 십년을 돌아보면 그런 기대를 계속 되뇌이고 싶다.
감동이란 키워드로 맞추다보니 억빠가 된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어쨌든 어떤 이유에서인지 위로가 되는 만화다. 춥고 깜깜한 겨울밤에 호롱불 하나 따듯하게 빛나는 그런 느낌이 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겨울새벽빛이라는 닉네임도 만들었었더랬다. 내 취향도 한결같구나 싶다.
마지막은 하나도 안 중요하고 쪼끄맣게 지나가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소개하며 마치고 싶다. 내가 가끔 외쳐도 지금까지는 다들 그냥 이새끼는 뭐라는 거야 하며 넘겼겠지만 이제부터는 그래 거기서 나온 대사구나 한번씩 생각해주길 바라면서..
“우리의 위대한 태양이 저기 있죠!”
- 이나영, 300광년 밖에서 “아침”을 맞으며
첫화 <멋진 우주선의 생존자에 대해> 링크: https://m.blog.naver.com/spdlqjzhql/221348468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