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았다고밖에…, 아니 그건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내린다고 한다. 그 반증은 쉬운 편이다. 감당하지 못했던 사람의 이름과 얼굴들을 안다. 그 일들을 곱씹…게 되는 일도 사실은 잘 없지만 억지로 곱씹어보면, 그들이 삶보다 내려놓기 어려워했던 것들이 무엇이었을까, 자존심? 배려? 이방감? 답이 짐작도 가지 않는 의문에 그저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한때 삶이 복잡해보였었지만 내 삶은 꽤 단순하다는 것을 언젠가 알았다. 살아있는 일과 저울질하게 된다면 무엇이든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된다. 이렇게 저렇게 폼을 잡아도 결국 운이 좋았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그래사 운이 나쁜 사람에게는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든 그건 운이 좋아서 가능했던 것 같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내린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내 경우 어쩌다보니 운이 좋은 사람들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악명이 높았던(지금도 학회에 가보면 그 잔향이 또렷한) 그런 연구실에 흥미 본위로 연을 맺어 적을 두었다. 흥미 본위로밖에는 머무르기 어려운 곳인 것 같다. 상당히 매니악한 분야에, 이제는 박사 입학은 받지도 않는 황혼의 연구실…. 커리어 보장은 되는 듯하지만 그것도 이 분야에 적응한 사람에 한정된다. 나 자신은 인생 계획에 큰 무게도 길이도 없이 이곳에 있다. 졸업 다음 일 정도야 생각해둔 것이 없지 않으나 그야말로 닥쳐있고 길이 열려있으니 따라간다는 느낌이다. 연구실의 다른 사람들도 뭐…, 인생에 고비가 없지는 않겠지만 큰 걱정 속에 사는 사람도 없어보인다.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그 분위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직감을 느꼈다. 일단 지금은 그런 결심을 하지 않을 결심이 유효한 상태이기에, 그런 결심을 할 분위기가 되지 않도록 나름의 조정을 꾸준히 하는 중이다. 깊은 생각을 억지로 그만둔다든지, 중요한(혹은 적어도 그렇다고 종용되는) 일들을 내팽개친다든지, 필요 이상의 휴식을 끼워넣는다든지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다중의 안전장치를 걸지 않아서 죽는다면 말짱 도루묵이기도 하고, 한편은 운이 좋게도 그렇게 미뤄두는 것들도 어느날 보면 해결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이것저것 미루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은 아무것도 미룰 수 없을 만큼 뒤틀리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이미 뭐든지 미룰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 뭐든지 미룰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조차도 운이 좋은 것 같다. 만약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치가 떨리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부끄러움에 죽음을 택할 사람이었더라면 그렇게 생각하지는 못했을텐데, 지금은 별로 부끄러움이 없어진 사람이다. 오늘도 고래고래 노래를 지르고 왔다. 이것저것 다 미루고 아무것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부끄럼 없이 질렀다…라고 하기엔 오늘을 돌아보면 많은 일을 한 것도 같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이렇게 스스로의 불성실함에 괴로워하는 것 자체가 성실함의 반증이라고 한다. 왠지 모르게 해야 할 일은 때맞춰 하게 되는 것도 운이 좋게도 성실한 성격 때문인 것 같다.. 이거고 저거고 운 탓을 하고 도망쳐버리고 싶지만 또 왠지 도망까지는 안 쳐보고싶어졌다. 그래서 나름 아는 만큼 말할 수 있는 만큼 말해보는 것이다. 도망친 것과 얼마만큼 다른가 싶지만… 어쨌든 나는 여기에 있겠다. 밤과 눈을 맞춘 채.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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