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살인의 이유를 “햇빛이 눈부셔서”로 밝힌다. 이는 배심원들이 뫼르소를 사회 부적격자로 판단한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뫼르소는 사형에 처한다. “후후 나 싸이코패스인듯”이라는 말을 하려는건 아니지만 나는 소설을 읽으며 뫼르소의 내면에 어떤 생각의 흐름이 있었는지 읽었기에 햇빛이 눈부셔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데에 공감이 갔다. 본래 인과 관계라는 건 임의적인 면이 있다. 가장 단순한 논리 체계인 일차논리에서는 인과 관계에 대한 서술이 없다. “갑이 참일 때 항상 을도 참이다”라는 함의 관계(갑 → 을)는 있지만 이것을 항상 “갑이 참이기 때문에 을이 참이다”라는 인과 관계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약속에 절대 늦지 않는 철수라는 사람에 대해 “철수가 약속에 이렇게 늦는 걸 보면 오는길에 무슨 일이 생긴거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철수가 늦는다 → 철수가 오는길에 일이 생겼다”라는 함의관계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함의 관계를 “철수가 약속에 늦는 것을 원인으로 오는 길에 무슨일이 생기는 결과가 나온다”라는 인과 관계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엄밀 논리(formal logic)의 세계에서 함의 관계는 항상 보이지만 인과 관계라는 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인과 관계를 엄밀하게 정의해본다면 일종의 가능세계 개념을 써볼 수 있을 것이다. 가능세계는 본래 관점 논리를 고전 논리로 해석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다. 관점 논리란 어떤 사실이 “참”이라고 판단할 때 여러 관점에서의 참을 섞어쓸 수 있도록 확장한 논리 체계다. 특히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경우, 기본적으로 “갑은 지금 참이다”라는 관점에 더불어서 “갑은 필연적으로 참이다”라는 관점, “갑은 참일 수도 있다”라는 관점이 추가된다. 이 애매해 보이는 말들은 “세계”와 “도달가능한 세계”라는 개념으로 보다 엄밀하게, 고전논리의 언어만 써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사실이든 그 사실을 말할 때에는 특정한 “세계”를 가정하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 수식어 없이 “갑이 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그 사실이 참이라는 말로 해석한다. “갑이 필연적으로 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가정한 세계로부터 도달할 수 있는 모든 세계에서 그 사실이 참이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갑이 참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가정한 세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세계들 가운데에 그 사실이 참이 되는 세계가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핵심은 어떤 말을 할 때에는 항상 그 말을 하고 있는 세계가 가정이 되어있고, 세계 사이에는 도달가능성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도달가능성을 시간적 전후 관계로 바라본다면, 또 도달가능성을 단순한 참거짓을 넘어 일종의 확률로써 바라본다면, 이를 바탕으로 인과 관계도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갑이 을의 원인”이라는 말은, 갑이 참인 세계에서는 을이 참인 세계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고, 갑이 거짓인 세계에서는 을이 참인 세계에 도달할 가능성이 낮으며, 이 갑이라는 원인이 참일 가능성과 거짓일 가능성이 얼추 비슷하다는 말이다. 만약 뫼르소가 해변을 걸었던 그날, 피해자와 마주친 그 순간, 햇빛이 눈부시지 않았다면 뫼르소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식으로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걸었던 해변의 모래알 수만큼 많을 것이다. 그러니 그 다른 원인들을 모두 무시한채 뫼르소가 세상에서 동떨어진 성격이라 살인을 저질렀다고 단정짓는 건… 너무나 임의적인 판단인 것이다. 가능성으로 따지자면 그의 성격이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희박했던 것 아닐까. 어제 내가 기껏 하기싫은 일을 하러 억지로 윗공대에 올라가놨더니 카페가 15분 전에 닫아서 그대로 다시 내려온 것도, 내가 늦잠을 잤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임의적인 판단이다. 모래알 같이 무수한 원인들 사이에서 ‘진짜’ 원인을 골라낼 때는 사람마다 자신이 가장 통제할 자신이 있는, 말하자면 “그때로 돌아간다면 바꾸고 싶다”라고 말하는 그 원인을 진짜 원인으로 내세우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정한 원인은 사람마다 달라진다. 당연히 각자가 바꿀 자신이 있는 정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늦잠을 자지 않을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카페가 문닫는 시간을 정확히 알았을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앞으로는 문닫는 시간을 잘 확인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바꿀 자신은 없지만 그 과거를 한번 겪은 미래를 바꿀 자신은 있으니까 결심 쪽이 더 바람직하다. 뫼르소의 경우는 어떨까. 뫼르소 자신은 아마 세상의 어느것도 그리고 그 자신조차도 바꿀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방인’이라는 감각의 실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무력감, 그러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기만 하겠다면 마음을 닫아버린 상태다. 그러니까 피해자가 친구의 원수였고 자신의 손에 우연히 총이 들려있었고 더위를 먹고 정신이 혼미했다는 전후 사실들도, 햇빛이 눈부시다는 그 찰나의 인상과 비교했을 때 통제할 자신도 나와의 관련성도 특별히 크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 자체도 굳이 “거짓” 증언으로 피할 만큼의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다. 배심원들이 판단하기에는 그는 충동적이고 비양심적인 성격이고 언제나 그래왔고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들은 뫼르소의 그런 심성을 바꿀 자신은 없지만 그를 사화로부터 영구적으로 격리할 자신은 만만하기 때문에 사형을 내렸다. <이방인>을 쓴 까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뫼르소가 단지 무력감이라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상태가 많은 현대인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에 대해 논리적 추론에 따른 결론에 따라 삶의 태도를 바꾸어보자는 해결책은 아직 미심쩍지만 적어도 그 무력감과 무심함을 개선될 수 있는 상태로 바라본 것은 까뮈와 배심원의 다른 점이다. 나는 뫼르소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이야기에 격렬한 공포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 삶이 그 이야기에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에 공포감을 느끼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전과는 다른 이야기에 공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변해간다면 일단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카페가 문닫았으니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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