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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의 독서 기록

왼손잡이해방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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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년 닥치는 대로 책을 사서 게걸스럽게 읽었다. 대부분 소설이다. 일단 지금은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승우의 <<생의 이면>>을 읽고나서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는다. 정말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대여점에 있는 책을 모조리 빌려읽는다. 삶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에는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어두침침한 골방에 하루종일 틀어박혀있는다. 그가 읽은 책 중 하나로 표드르 도스토예프스끼의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제시된다. 그 수기는 물리적으로 지하실에서 쓰여졌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하실에서 꺼내올린 것이라고.... 난 그 책을 이어서 읽었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은 책에서 읽은대로의 이상주의로 말하고 행동하였으나 세상에 나가서는 열등감과 모욕감만 느끼고 지하실에 틀어박힌다. 그리고는 여태까지 읽은 책들을 비웃는 장황한 일장연설을 수기로 적어내려간다.

그런 인물들을 만나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돌아보는 기회가 생긴다. 이 게걸스러운 탐독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 제대로 된 삶을 이어나가는 데에 이로운 것은 아니다. 어째서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있게 되었는지 정확한 인과 분석은 할 수 없으나 마지막에 읽은 책들에서 느낀 자괴감이 일조한 것은 틀림없다.

올해 읽은 소설들. 한강의 <<희랍어 시간>>, 정대건의 <<급류>>, 정보라 소설집 <<저주토끼>>, 양귀자의 <<모순>>, 이승우 소설집 <<목소리들>>, 정보라의 <<밤이 오면 우리는>>, 한강 소설집 <<노랑무늬영원>>, 정유정의 <<종의 기원>>,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 최은영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2025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이승우의 <<생의 이면>>, 김청귤의 <<재와 물거품>>, 최진영의 <<구의 증명>>, 표드르 도스토예프스끼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나쓰메 소세끼의 <<도련님>>.

가끔 도지던 웹툰 정주행병이 새로운 숙주를 찾은 것이다. 이제는 완결 웹툰 목록을 그저 둘러봐서는 흥미롭지만 아무도 읽지 않아 무료 공개되어있는 만화를 찾기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재밌을지 어떨지 불확실한 만화보다는 문단에 등단한 작가의 장편소설이 서사적 도파민을 분비시키기에 가성비가 좋다. 게다가 책은 비교적 유구하므로 도덕적 만족감을 이끌어내기에 훨씬 효과적이다.

효용감과 별개로 나는 이 책들을 얼마나 흡수했는가? 단편은 뭐... 제목을 읽으면 가물가물 기억이 날지도? 애초에 단편은 장편에 비해 임팩트가 훨씬 약하다. 세팅만 해놓고 도망간 느낌. 그에 비해 장편에 대해서는 대부분 기억이 난다.

  • <<희랍어 시간>>. 한 단어에 너무나 많은 의미가 욱여담긴 희랍어. 혀와 눈을 잃은 두 주인공. 한 번 더 읽으면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급류>>, <<종의 기원>>. 줄거리는 재미있지만 개인적으로 기대한 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 <<모순>>. 주인공이 모순적이다. 여자가, 아니 인간이 모순적인가. 화딱지 나는 결말이었다. 양귀자 소설을 더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 <<밤이 오면 우리는>>. <<저주토끼>>를 읽고 정보라 책을 한권더 사봤는데 좀 애매했다. 너무 대놓고 씨발씨발 욕지거리하는 대사는 흥미를 떨어뜨린다.
  • <<작별하지 않는다>>. 국가 폭력의 묘사가 적나라하다. 징그러워서 읽기 힘들었다. 한강이 좀 고어 묘사를 자주 하는 것 같다. 그만큼 그가 보는 이 세상이 잔인한 거겠지.
  • <<재와 물거품>>. 작가 이름이 귤이라 호감이다. 그럭저럭 야하기도 하고 재밌었다.
  • <<구의 증명>>. 남자친구 시체 뜯어먹는 내용...이라고만 쓰기엔 모욕적이지만 대단히 징그러워서 읽기 힘들었던 게 있는 그대로의 감상이다.
  • <<도련님>>. 나쓰메 소세끼의 자전적 소설. 기대한대로의 유쾌한 문장들이었다.

유일하게 기억이 잘 안 나는 게 <<계속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막 읽기 시작했는데 첫장부터 미친 것 같아서 공유하려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있지.
네 할아버지는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고 죽은 것이 아니야.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홍수가 있었거든.

홍수가 나서 많은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죽었거든. 네 할아버지는 그 난리 통에 낚시를 했단다. 집이며 짐승이며 사람이 쓸려가고 있는 흙탕물에 낚싯대를 던져두고 고기를 잡았단다. 그 물에서 건진 물고기를 먹고 죽은 거란다. 물에 휘말린 사람들을 생각해보렴. 오죽이나 원통했겠니. 오죽이나 고통스러웠겠니. 그런 물에 낚싯바늘을 담근 사람이라서, 급사한 거란다. 네 할아버지는 그 낚싯바늘에 뺨이나 등을 긁힌 사람들의 원한을 먹고 죽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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