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해방연대 아지트

사용자 확인중...

직관의 축적

이름,

28

2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해 디터 람스라는 디자이너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간단해야하고, 유용하게 하는 것이며, 이해 가능한 방식이어야 한다고 했다. 디자인이라는게 단순히 적당히 예뻐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실용성과 직관성으로 증명해야 하고, 그것이 사실 아름다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직관적 디자인은 사용자가 끝없이 긴 메뉴얼을 읽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고, 잘못된 길을 걷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직관적 디자인, 즉, 누구인지도 모를 사용자에게 이해 가능한 디자인을 제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직관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 직관성이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2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천적 본능의 작동 기제, 그리고 기억이나 학습을 거친 후천적 직관성이다.
   단순본능은 보편적 인간의 뇌를 가진 경우 작동한다. 예를 들어 경적을 울려 주변에 위험을 알리거나 하는 식이다. 특별히 학습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굉음에 당황하거나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 디자인이 이러한 극단적 단순성에서만 출발할수는 없다.  직관적으로 데이터센터에서 특정한 자료를 가져오는 방법이란것은 어떻게 만들어진단 말인가? 처음에는 아마도 단순성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대상영속성을 배우고 나면 이제는 물건이 다른 물건 뒤에 있더라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직관성의 범주 내로 포획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직관성에는 상대성이 발생한다. 외국어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던지, 스마트폰에 옛날 수화기 모양의 아이콘을 보고 그게 통화 기능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던가 하는 식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직관을 축적한다


   직관의 축적은 분명 개인 단위로 이루어지지만, 모든 제품을 개별화시킬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는 여전히 사회적 직관이 축적되어야만 작동한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사회적 기억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디자인을 개인적인, 신비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의아해지는 부분이 여기서부터다. 사회적인 직관은 문화의 축적, 교육과 함께 진행된다. 젊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고 댓글을 남기는 과정이 직관적이라고 느끼는데 반해, 노인 계층은 전혀 직관성을 느낄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자신의 직관성을 타인의 직관성과 동일시하는 마음 때문이다. 따라서 직관적 디자인은 언제나 타겟층을 가진다. 전문가 계층에서 끊임없는 자기되먹임 구조로 형성된 직관성은 그것 때문에 직관성을 잃는다. 다만 그것은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기도 하다. 흔히 엔지니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한 사람들은 직관성을 희생하고 기능성을 극한으로 추구한다. 흔히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이 더 강한 사람들은 이론상의 기능성을 다소 제한하는 한이 있더라도 실제적인 기능성과 직관성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나름의 분업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러한 자각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간혹 전문 프로그램들을 보면 어색할때가 있다. 수많은 기능이 써있는 토글과 메뉴로 가득차있는 UI를 보면 과연 이 기능을 사람들이 다 알고 쓰는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포토샵을 써왔더라도 어디가서 "저는 포토샵을 다룰 줄 압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어떤것이 제품으로 나온다는 것은, 그 사용자가 그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였을 때의 효과가 실제 기능인 것이다. 스마트폰을 원시인들에게 던져준다면 그것은 사실 기능이 거의 없는 물건에 가깝다. 그 물건의 작동반경과 그 제품의 실현반경이 다른것이다. 대중으로서는 끊임없이 직관성의 범위를 넓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더 마음놓고 고기능의 물건을 출시할 수 있도록 배워나가야 하고,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는 끊임없이 극한의 기능과 실용성을 고민해나가야 할것이다.
   
   처음 이 논제를 생각하게된 계기는 어떤 일본인들과의 대화에서 나왔다. 특이한 건축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 도쿄 근교의 거대한 우체통이라던가, 일산의 오뎅탑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소개했다. 그러다 내가 먼저 새로지은 서울시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왔다. 나는 한국에서 논란되는 이유가 유리파사드의 열효율적 관점의 실용성과 파도모양의 사치스럽고 과감한 형태가 과연 검소하고 시민들을 위해야할 시청사로서 적합한지, 이것이 충분히 실용적인 세금사용인지에 대해 찬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인으로서는 전혀 다른 모양새로 읽힌다고 말했다. 서울의 구시청사는 일제에서 만들었는데, 그 시청사를 바로 뒤에서 한국에서 지은 신청사가 파도로 덮치듯이 디자인한 것은 도호쿠 대지진에 대한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디자인이라는 점이었다. 듣고보니 그런것 같았다. 그들의 기준에서는 직관적으로 어쩌면 일본의 상처에 대한 일종의 조롱으로 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건물로서 과연 그런 계산이 개입된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아마 평범한 한국인들이라면 단지 국민 혈세 제대로 쓰고 있는지가 관건일 테니까 말이다. 반대로 일본에서 무신경하게 하는 일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제강점기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직관성의 범위는 언제나 디자인에서의 고민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억지스러운 3줄 요약

1. 디자인의 관건인 '직관'은 본능외에 학습과 기억에도 의존한다.
2. 직관성의 근거가 되는 학습과 기억은 각자 다르다. 
3. 따라서 다양한 직관성에 맞는 디자인이 관건이다.


목록

포토샵의 반대편에 유닉스 철학이 있습니다. 기능마다 매번 도구를 설치하기 vs 모든 기능을 가진 도구를 한번 설치하기, 선택은 사용자의 몫이죠.

디자이너가 이긴 제품 vs. 엔지니어가 이긴 제품 같은 밈을 볼 때마다 그냥 이해가 되니까 웃긴 했는데 이제는 왜 그 사진을 보고 디자이너나 엔지니어가 먼저 떠올랐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