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도 읽었던 《어린 왕자》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들의 생각을 며칠 전 유튜브에서 보고, 그 내용에 이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 본다(맨 밑에 3줄 요약 있다). 어떤 면에선 링크로 걸어둔 아래 글의 후속일지도 모르겠지만, 꼭 저 글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https://blog.freleefty.org/articles/531/ 이 글을 쓰는 게 단순히 《어린 왕자》에 대한 어떤 기가 막힌 해석을 보고 감동받아서만은 아닌 듯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에 가진 느낌을 끄집어 내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 깊은 곳의 느낌을 기반으로 하여 나의 세상을 다시 구축해보기로 하였다. 나는 지금 사회적으로 규정된 어른이다. 솔직히 정신연령이 '어른'이라 할 만큼 성장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한국 법에서는 만 19세 이상을 성인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보통 어른이라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는가? 수많은 경험을 쌓아 많은 것을 알고, 그를 기반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과 책임감을 갖춰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 다 같진 않더라도 이런 느낌을 이 단어에서 받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왜냐고? 주변 사람들이 그런 뉘앙스로 쓰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데, 현재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른'이라 칭하기엔 멀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오죽하면 "옛날 30대, 요즘 30대" 비교짤 같은 것까지 밈으로 돌겠는가. 왜들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난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말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느끼는 세계는 사실 대부분이 상상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수많은 것들에 부여된 의미는 여러 사람들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다. 횡단보도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다면 우리는 건너지 않고 멈춰 선다. 왜 그런 걸까? 빨간 불에 사실 마법같은 능력이 있어서 사람의 몸을 물리적으로 꼼짝 못하게 경직시키는 걸까? 그렇진 않단 말이다. 우리는 빨간 불일 때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그냥 지나가는 차와 부딪혀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한다. 신호등의 빨간 빛은 자연 상에서는 파장 약 700nm의 전자기파일 뿐이지만, 사람들의 상상 하에서 의미가 피어나 그들을 멈춰 세운다. 그리고 이 상상이 모여 "빨간 불일 때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라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된다. 이런 것처럼, 자연 속에서는 그저 존재할 뿐인 것들이 사람들의 사회 속으로 들어가면 상상을 통해 별의 별 의미를 다 갖게 되지만, 놀랍게도 그곳의 모두가 그 의미를 수긍한다. 사회가 통째로 그 의미에 대한 합의를 본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이야기는 《사피엔스》의 앞부분에도 비슷한 맥락으로 나오기 때문에, 꽤나 친근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상상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증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렇게 하는 게 좋은 삶이야!" 류의 이야기, 조언들이 요즘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함께 떠다닌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매일매일의 생산성을 높이는 흔히 말하는 갓생의 이미지, 인간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크고 작은 팁들,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돈과 권력 등... 이런 건 개개인이 다르게 받아들이겠지만, 입소문과 인터넷을 타고 온 세상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 상상의 대전제가 된다. 당장 학교에서도 절대로 끊이지 않는 학점의 중요성에 대한 담론, 대학원과 유학에 대한 질의응답... 이런 것들 밑에 학점을 잘 챙기는 것, 위상 높은 랩에서 연구하는 게 좋은 것이라는 전제를 알게 모르게 깔아놓고 있을 수 있다. '그게 좋은 건가?'라 물어보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어디선가 올라올지도 모른다. '그게 왜 좋은 건데?'라고 물어보면,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포함해서)나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가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거"들은 가변적이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시간에 따라 변할 때, 이 "증거"의 내용도 변한다. 50년 뒤에도 빨간 불이 멈추는 신호고 초록 불이 건너는 신호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건 사람들이 생각하고 암묵적으로 합의해 규칙을 정하기 나름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추앙받는 부와 명예, 사람들이 닮고자 하는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좋은 직업과 좋은 환경들이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일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정보가 엄청나게 빠르게 퍼져 나가는 시대이다. 사건 하나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속도와 규모가 예전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크다. 그럴 때마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붙잡고 상상한다면, 그 상상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흐름의 뒤꽁무니를, 자신의 삶도 그 상상의 뒤꽁무니를 따라갈 것이다. 이렇게 "증거"를 따라가는 삶은 스스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를 수도 있지만 거스를 수도 있고, 어쩌면 스스로에게 큰 짐을 지우는 삶일지도 모른다. 그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삶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할 수 있는 삶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아까도 말했듯 사람들이 보여주는 증거는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는 그에 따라 다양한 상상을 하게 된다. 그 상상에 따라 좋은 결과가 기대되는 것을 무작정 하다 보면, 과연 그 모든 것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일이 미래를 대비하는 좋은 방법이라 해서 그걸 하다 보니, 정말 자기랑 안 맞는 일이라 열정도 안 생기고 정신력도 빠르게 소모된다면? 아니면 주위에서 그걸 통해 성공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지 못한 자신을 탓하게 된다면? 주위가, 사회가 "증거"로써 말하고 보여주는 가치랑 나 자신이 상충해서 갈등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은 지금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었으리라 생각한다. 나 또한 이런 것 때문에 정말 많은 감정을 토해냈었고. 그래서 지금의 나는 "좋은 것"을 하면서 마음이 힘들다면,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내 마음의 느낌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어느 여우가 말했다. 그 말처럼 주변에서, 또는 세상에서 "~~하는 것이 좋다" 류의 이야기를 직접 보거나 들었더라도, 그것의 진짜 답은 자신의 마음이 직접 느낀 것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애초에 좋다와 나쁘다의 개념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겠다. 그저, 내 마음이 좋거나 나쁘다고 느낄 뿐이다. 이 느낌을 나 밖에서 누군가 주입할 수는 없다. 단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자극을 내 마음속이 '느낌'이라는 형태로 재구성할 뿐이다. 하지만 이 마음의 느낌은 시각이나 청각처럼 즉각적이지 않기에, 오랜 시간을 두고 내 마음을 지긋이 바라보아야 한다. 시간을 쏟을수록 내 마음이 수많은 자극에 '느낌'으로 반응하는 형태가 뚜렷해지고, 그것이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상상을 이끌 '증거'가 될 것이다. 이 마음의 '증거'를 깨닫게 된 건 꽤나 최근이다. 지난 겨울, 난 원래 참여하고 있던 연구를 그만두었다. 작년 여름부터 많은 시간을 쏟고 완성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이유는, 그 전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 때문에 내 마음은 이미 너무나도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이 연구를 포기하기까지 2주를 넘게 고민했었으니까. 공저자긴 하지만 업계에서 최고급으로 쳐주는 논문 실적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 내 연구자의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이건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내 마음은 더 이상 무리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난 마음의 느낌을 따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 후로 한 달간 휴식을 취한 나는, 별로 흥미가 크지 않은 지난 연구 주제를 뒤로하고 내가 더 좋아하는 주제의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 덕에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며 수많은 관심 어린 눈빛을 받았고, 인정 또한 받았다. 똑같이 연구를 하기 위해 노트북을 쳐다보는 눈빛도, 지난 연구를 버리고 새로운 연구를 시작한 뒤 훨씬 빛나는 것 같았다. 목표로 하는 학회나 논문의 파급력만 놓고 보자면, 지난 연구를 버리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훨씬 "좋은"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마음으로 보는 '증거'를 가지고 상상하는 것은 사람마다 매우 다를 것이지만, 각자의 삶 안에서는 굳건하고 일관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마음의 '느낌'과 세상이 보여주는 "증거"는 독립적이고, 나의 세상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상상에 기반한다. 그렇기에 내 마음을 중심으로 한 세상에서 보이는 "증거"는 끊임없이 변할 것이지만,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은 내 세상과 일관되게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태도가 어쩌면 '스스로' 생각하는 진짜 '어른'이 되는 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세상이 보여주는 어른이 아닌 나 자신이 느끼는 '어른'이겠지. 너무나 많은 짐을 떠안고 있다고 생각할 때, 너무 힘들 때도 일어서 다시 길을 찾아 스스로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어린 왕자는 아이였다. 아이들은 보여지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할 줄 안다. 이런 어린 태도가, 역설적이게도 어른이 된 나에게 삶을 어떤 마음으로 살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원하는 진짜 '어른'의 모습은, 아이의 눈을 갖추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여기에 수많은 경험을 통해 성숙한 성인의 상상력을 더하면, 비로소 나 자신을 불필요하게 괴롭히지 않고 스스로를 정말 만족시키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떠오르는 생각들이 홍수처럼 넘쳐흘러서,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나 자신도 참 곤란하다. 그래서인지 내 예상보다 글도 엄청나게 길어졌고, 난잡해진 것 같기도 하다. 미래의 내가 보면 틀림없이 이상하게 쓴 글이라고 하겠지. 그러니까, 짧게만 다시 정리해 본다. 1. 각자의 세계는 사실 각자의 상상으로 이루어진다. 2. 가장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건 마음으로 보이는 것이다. 3. 아이의 눈을 갖출 때 비로소 내가 스스로 원하는 어른이 된다.
아이로 보는 어른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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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때 서버 끄려고했는데 엄할뻔했네
세줄요약있는거 호감도 ㅆㅅㅌㅊ
좋은 글입니다 잘읽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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