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렌더를 아주 천천히 했다. 착한 친구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간을 기다려준다. 스플렌더는 월급으로 나오는 보석을 모아서 보석 광산(꼭 광산은 아니지만 대충 보석이 나오는 공급원)을 사는 게임이다. 광산이 있으면 다른 광산을 살 때 할인을 받는다. 광산마다 0-5점의 점수가 붙어있는데, 점수가 있는 광산을 모아서 15점을 처음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보석은 5가지 종류가 있다. 광산을 살 때에는 공개된 12가지 카드 중에서 고를 수 있다. 월급을 받고 광산을 사는 순서를 잘 생각해서 점수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올리는 것이 좋다. 난 이 게임을 하면서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 대개 보드게임을 할 때는 생각이 많다. 대부분이 쓸데없는 생각이다. 전략 없이 규칙에 따라 모든 경우를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것 같으면 결론을 내린 과정은 잊어버린다. 그리고 매번 기억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같은 생각의 과정을 재현하려 하고 절반 정도는 실패한다. 내 생각에 문제는 이것이다. 대개는 두 턴 이상의 계획을 세운 다음, 새로운 패가 공개되면 그 패를 따기 위한 새로운 두 턴짜리 계획을 세운다. 매번 새로운 계획에 따라 행동을 하고 결국 아무 계획도 완수하지 못한다. 반면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계획을 완수하므로 점수를 먼저 낸다. 내가 점수를 내기 전에 저들이 점수를 내므로 게임은 끝나고 나는 더이상 점수를 내지 못한다. 시간이 한없이 많다면 계획은 마구 미뤄도 된다. 아마 언젠가는 새로이 하고 싶은 것이 더 안 생길 것이고 그 때에는 미뤄둔 계획을 이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시간 이후에 내 계획은 모두 완수되어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내 시간은 아주 차갑게 수학적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나는 계획을 무한정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나는 대화를 할 때에도 LIFO로, 가장 나중에 들어온 화제부터 이야기하는 것 같다. 과거나 미래에 현재를 저당잡히고 싶지 않다고 언젠가 생각했었다. 그래서 현재에만, 오로지 현재의 가장 시급한 소망과 욕망에 집중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집중했다기보다는 어느새 그 이상한 결심에 사로잡혀 충동적으로만 살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저당잡히는 것과 현재를 과거와 미래에 저당잡히는 것, 둘은 가치판단적으로 얼마나 다를까. 어느쪽이든 너무 치우쳐 판단하는 것은 불행해지는 길일테다. 중용, 항상 중용이 필요하다. 이 건에 대해서만은 예와 같은 확신 뒤집기를 게을리한 것 같다. 요새는 동아리에서 “동기부여 스터디”를 하고 있다. 일주일 간 스스로 과제를 부여하여 스스로 평가하는 모임이다. 내 생애에 가장 거대하고 지속적인 계획 행위다. 여러가지를 넣어봤는데 나는 주로 매일 할 습관을 만드는 것은 잘 하지만 어떤 정해진 양의 과제를 하는 것은 잘 못한다. 매일 밥 해먹기, 매일 일찍 자기, 매일 아침 청소하기, 매일 운동하기는 이행률이 계속 높아지는 반면, 책 몇 페이지 읽기, 개발 프로젝트 진행하기는 꾸준히 0에 수렴한다. 좀 기묘한 것 같다. 보통 과제는 쉽고 습관 만들기는 어려워야 하는 거 아닌가. 과제를 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그래도 지금 돌아보면 책 읽기는 그래도 이번주는 꽤 진행을 했고(일요일에 벼락치기한거긴 해도) 개발도 아예 안하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만드려고 한 습관이 단순하기도 했다. 개발 프로젝트는 생각하고 계획할 것들이 있으니 자꾸 미뤄지는 것 같다. 동기부여 스터디의 좋은 점은 내가 해낸 것들을 효과적으로 수치화하여 보여준다는 점이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해낸 일도 해냈는 줄 모르므로 어영부영 살았을 것이다. 해낸 일을 해냈음을 알면 내가 해낼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어떤 것은 잘 하고 어떤 것은 더디지만 어쨌든 계속 바뀌어나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제는 삶의 가장 큰 고민, 거의 괴물과도 같아서 피해다녔던 고민을 무찌를 때가 되었다. 나의 계획성에 관한 것이다. 내 삶엔 아무 계획이 없다. 계획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세계에 살지는 못한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운이 좋다는 것에 죄악감을 느끼지는 않기로 했다. 좋은 운을 잘 이용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생존보다 조금이라도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계획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바라는 게 별로 없었다. 역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바라기도 전에 필요한 것들은 주어졌던 것 같다. 바라지 않으므로 목표가 없고 목표가 없으므로 평가할 것이 없다. 평가가 안 되므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으므로 어떤 일에도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데에 너무 익숙해졌다. 최근은 한동안 재미없는 날들이었다. 그런 삶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생각했다. 살아야한다고 결론 내렸던, 잊어버린 과정을 재현하려 했다. 다행히 쉬운 일이었다. 재미있어질 것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다. 죽으면 재미없는 채로 끝이니까 재미없다. 그 다음, 이 재미없는 날들을 나는 미워할 수 밖에 없는지 생각했다. 나는 내 삶의 모든 면을 인정하고 긍정하고 싶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을 스스로를 나만은 반드시 품어야 한다. 고민 끝에 기억해낸 것은 내가 더 좋은 더 멋진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던 일이었다. 사람이 프로그램이라고 할 때 주어진 입력에 대해 결과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프로그램을 고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업데이트는 이후의 내 모든 행동을 바꿔놓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는 유의미하다. 또한 모든 변화의 도전은 유의미하다. 성공은 도전 없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뀌고 있다. 바뀌고자 하고 있으므로 이 날들은 의미가 있다. 의미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이젠 가장 큰 문제인 무계획성을 마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주 동기부여의 한 항목으로 ‘매일 하루 계획 세우기’를 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스플렌더를 했다. 역시 나는 아무 계획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걸 인지하고 계획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계획을 지켰다. 마지막 판은 꼴찌를 면했다. 아마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행적으로 볼 때 그러하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 그리고 이 말 뒤에는 항상 예정된 개고생이 뒤따른다. 고생만은 다한것이나 다름없지가 않고 이제부터 하기로 정해져 있을 뿐이라는 점이 뭐랄까 귀찮고 괜히 한숨이 나오는 부분이다. 그래도 재밌지 않을까?
LIFO형 스플렌더
28
3
목록
댓글이 없습니다
-
어른이 본 아이의 눈2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