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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본 아이의 눈

회전하는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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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의 친구가, 겨울에 공원에 늘어선 앙상한 나무들의 가지를 보고 "손을 올려서 우리를 부르고 있어"라고 말한다면,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 또는 거대한 오르골 앞에 세워져 있는 두 마리의 강아지 조형물을 보고, "오른쪽에 있는 애가 오르골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서, 왼쪽 애한테 '여기 들어봐봐, 음악 소리가 나오고 있어!'라고 속삭이고 있어"라고 말한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이 얘기를 듣고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런 상상을 해 볼 수 있겠지만, 꽤 많은 사람들은 "저런 발상이 어디서 나온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리라고 감히 예상한다. 삶은 달걀의 바닥을 깨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걸 처음 생각해내기는 쉽지 않듯이.

보통 이런 신박한 상상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많이 들을 수 있다. 아이들의 상상은 자유롭다. 그리고, 틀에 갇힌 어른들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는 '너머'를 본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자와 그 속을 본 어른인 우리들은, 그 안에 자그마한 양이 들어있다고 말하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머에 있는 걸 상상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 아닌가. 왜 어른이 된 우리는 그런 상상을 하는 게 어려워지게 된 걸까. 점점 보고, 느끼고, 배우는 것이 늘어나면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돼"라든가 "이 것은 이러이러한 것을 해"같은 세상의 이치에 대해 더 박식해져서...라고 생각한다. 자라면서 깨닫는 수많은 세상의 이치들은, 되려 생각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막아버리는 것 같다.

아이들의 생각에 대해 또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들은 겉보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진짜로 의미가 있고 실체에게 영향을 주는 것, 즉 '본질'에 초점을 둔다. 달리 말하자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는다. 어떤 아이는 장미에게 가시가 있는 이유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길 것이고, 그걸 어른들에게 물어볼 것이다. 하지만, 장미에게 달린 가시보다 당장 자신의 성적표, 통장 등등에 찍힌 숫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어른들이 건성건성 대답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돈의 액수, 성적을 나타내는 숫자가 가진 의미는 너무나도 막연하다. 통장에 찍힌 숫자가 크면, 돈이 많다는 의미이므로 더 많은 걸 살 수 있다. 그래서 뭐? 더 많은 걸 사면 어떻게 행복해진다는 건데? 아니 정말로 행복해진다는 건 맞아?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통장 액수의 의미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그렇기에 의미가 없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반면, 장미에 달린 가시가 가진 의미는 간단하고 직관적이며, 무엇보다도 장미 자신의 목숨과 큰 관련이 있다. 꽃들은 약하고 쉽게 먹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먹히지 않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그래서 자기 줄기에 가시를 달면, 스스로 무시무시해져서 잡아먹히지 않게 되리라고 믿는다. 꽃들이 정말 그런 믿음을 갖고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 아이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장미들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하든, 그런 생각이 없든 간에 자기를 가시를 통해 보호하려는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고, 아이들은 여기에 집중을 하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본질'이라는 게 내 스스로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진짜로, 실체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하나의 개념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 애용하는 방법을 한 번 써 봤다. 바로, 대척점에 있는 개념 설명하기. 위에서 아이들이 집중하는 '본질'의 반대 개념이라 하면,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겉보기의 의미를 지닌 것들'쯤 될 것이다. 돈의 액수, 성적, 실적, 권력, 뭐 이런 거. 이런 것들의 공통점을 살펴보자면, 바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부여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돈의 가치도, 실적도, 권력도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쓸모가 크게 떨어진다. 다이소에서 신사임당 그림이 그려진 노란 종이 조각 한 장으로 텀블러 10개를 구입하는 행위는 그 노란 종이 조각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우리나라 사회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회 내 모두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행위를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수십 광년 떨어진 어떤 지성체가 있는 행성에 이 종이 조각을 들고 간다고 해도 텀블러 10개는 커녕 컵 한 개도 사지 못할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부여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그 의미가 그 사회 내 모든 이들에게 '공통점'이 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개념의 반대편에 서 있는 '본질'이라는 개념은 개개인이 가진 '차이점'이 될 것이다. 그래! 이제 알 것 같았다. 본질이라는 건,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시켜 주는 것, 영어로 하면 uniqueness쯤 되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오브젝트가 너무나도 많고, 대충 보면 이것들 모두 비슷한 류끼리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인다. 그래서, 이 본질을 찾으려면 자세히 보아야 한다. 많은 노력을 들여 디테일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그에 긴 시간을 들여야 한다. 꽃밭에 심은 수많은 장미꽃들이 다 비슷해 보여도, 어떤 한 장미꽃에 애정을 주고 더 신경써서 물을 주며 관리하다 보면 그 많은 꽃들 사이에서도 애정을 더 준 놈이 한 눈에 보이듯이.

그래서 아이들이 본질을 보는 눈을 어른에 비해 훨씬 많이 쓰고 있나 보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배경 지식도 적고, 의무 때문에 뺏기는 시간도 적다. 어른들, 특히 현대의 어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말로 많은 지식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떠다니고 있고, 복잡해진 인간관계와 업무 속에서 신경써야 할 것도 많아 여기 소비하는 시간도 함께 많아진다. 그래서 어른들은 본질을 보는 눈을 쓰기 위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로, 금방 이해할 수 있는 '합의된 의미'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되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점점 돈, 점수, 실적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런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앞에서 얘기한 아이들의 '너머'를 보는 눈도 이렇게 쓰다 보니 결국 '본질'을 보는 눈의 연장선이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 또한, 상상의 대상을 자세히 관찰할 때 가능하다. 손을 올려 우리를 부르는 나무들은 그 잔가지들이 올린 손처럼 보이게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오르골 앞에 선 두 강아지 조형물의 대화도 그 눈과 귀의 각도, 서 있는 위치 등을 자세히 볼 때 그 디테일로부터 들리는 것이다. 아이들은 더 충분한 시간과 더 적은 배경지식의 제약을 통해 세상을 더 자세히 관찰해 본질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현실의 경계선 밖을 보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이젠 읽은 지 꽤 된 책의 반열에 올라버려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지만, 그 느낌을 어딘가에 안 남기고서는 못 배기겠는 책,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내게 준 메시지였다. 아니, 이렇게 남겨두어야만 내가 마주하는 하나의 소중한 마음이 내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아이로 남고 싶은 나에게, 아이의 관점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일깨워 준 소중한 메시지이다.

왜 내가 아이로 남고 싶어 하냐라는 의문도 있을 것 같다. 당장 생각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이거에 대해서는 또 시간 날 때 풀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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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된 의미에서도 본질을 잘 읽어내는게 멋진 어른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