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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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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신은 존재한다. 이 명제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두 사고선思考線의 교차점에서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오늘 들은 프로그래밍 언어 수업입니다. 오늘은 귀납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특히 집합을 귀납적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내 눈 앞에 사과씨 몇 개가 심어져 있을 때, 씨앗이 자라면 나무가 되어 더 많은 씨앗을 퍼트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세상에 무수한 사과가 열리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개의 무한 집합은 귀납법을 사용하면 유한한 규칙만으로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대개는 그럴 수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수학자들 사이에는 가장 중요한 무한집합이 놓여있었습니다. 바로 참인 명제의 집합이죠. 수학에서 사용하는 증명 규칙들을 나열해보니까 몇 개로 딱 유한하게 나올 것 같은 겁니다. 이거이거 귀납법으로 무엇이든지 증명할 수 있는 만능 체계를 발견하는 게 아닌가~ 라고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괴델이 그 기대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어떤 체계에서든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있다는 불완전성 정리를 냈습니다.

그런 명제들 가운데에 대표적이지는 않지만 수천년간 찜찜함을 풍기던 놈이 있습니다. 바로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입니다. 얘는 참도 거짓도 아니랍니다. 그럼 저 문장 자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냐 하는 것이 참 이상한 점인데 괴델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런 문장은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문법에는 맞지만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말인 거죠. 저 참과 거짓이라는 판단도 사실 수학적으로 자명하지는 않기 때문에 증명가능이라는 말을 씁니다. 괴델이 찾아낸 것은 "이 문장은 증명불가능하다"라는 문장을 어떤 문법에서든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편의상 "이 문장"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지시대명사가 없는 문법으로도 비슷한 의미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점에서 놀라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증명불가능하다"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참이라는 거죠. 실제로 증명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괴델이 증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증명은 못하지만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문장은 증명불가능하다" 는 문장을 G로 칭하겠습니다.

좀 멀리 오긴 했는데 어쨌건 귀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장 G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는 겁니다. 다시 사과씨 얘기로 돌아가면 사실 내가 모르는 씨앗이 어딘가 묻혀있을 수도 있으므로 세상에 사과뿐만 아니라 무수한 배나 참외가 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사과가 무수히 열리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통 귀납법에서는 확신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부분에만 집중을 합니다. 증명가능한 명제의 집합도 수학의 증명 규칙으로 귀납적으로 정의된 집합입니다. 참인 명제의 집합에서도 증명 규칙은 성립을 하지만 문장 G가 있는 것으로 보아 증명가능한 명제의 집합보다는 조금 큰 집합이겠죠? 이런 포함관계가 될 겁니다.

참인 명제의 집합 <code></code> 증명가능한 명제의 집합

오른쪽의 증명가능한 명제의 집합은 그래도 손에 잡히는 편입니다. 알고리즘으로 생성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참인 명제의 집합은 알고리즘으로 생성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참인 명제의 집합이 정말 있기나 할까요? 참과 거짓은 선과 악만큼이나 가치 판단적인 척도입니다. 정치 뉴스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 저들한테는 말도 안 되는 거짓일 수도 있는 거에요. 우리가 전지전능하고 저들이 타락한 악마라서가 아니라, 모두 사람이니까 당연히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는 겁니다.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어쨌든 참과 거짓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명징한 개념이 아닙니다. 심지어 한 사람한테만 물어봐도 확실한 답을 못하는 문제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포괄적이지만 그래도 보다 자명한 집합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건 어떤가요.

그럴듯한 명제의 집합 <code></code> 참인 명제의 집합 <code></code> 증명가능한 명제의 집합

그럴듯한 명제의 집합.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좀 웃기네요. 그냥 그럴듯하다고 치고 넘어갑시다. 참과 거짓이 뭐가 중요합니까. 재밌으면 그만입니다. 어쨌든 저는 차라리 그럴듯한 명제의 집합을 찾는 게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몰라도 그럴듯하다고는 생각할 수 있잖아요. 참인 명제의 집합은 저 사이 어디에 떠다니고 있겠죠. 그런 내용의 낙서를 강의 들으면서 끄적여봤습니다. 이게 첫번째 사고선입니다.

두번째 사고선은 딱히 생각이랄 것도 없네요. 방금 종교와 영화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신학은 신앙 안에서 종교적 주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학문이다"라는 문장이 방아쇠가 된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종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첫번째 사고선과 교차하면서 사실 신은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건 꽤 진실된 명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반증할 수도 없죠. 신이 있든 말든 이 세상은 설명이 됩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redundant한, 불필요하게 넘치는 가정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럴듯한 명제의 집합과 관련하여 따져보니 신의 존재란 게 참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럴듯하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신앙으로 기울게 되잖아요. 감정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논리적으로도 신이 있는 편이 그럴듯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 아닐까요? 참과 거짓이 무의미하다면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명제가 그럴듯한가 하는 점입니다. 신의 존재란 건 참 그럴듯하네요. 마침내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은 존재한다

실은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해를 살까 덧붙이자면 전 역시 인격적인 신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일종의 신화라고 생각해요. 실존하는 개념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죠. 일단은 신성히 여길 만한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신으로 부를만하다, 라는 입장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후 세계나 영혼 같은 건 역시 있는 편이 재밌겠다는 생각이지만 이 부분은 정말 완벽히 불가지론입니다. 죽어봐야 알겠죠? 그래도 없다고 치고 열심히 사는 편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이거 쓰느라 또 녹강을 겐세이 당했는데 언젠가 보면 되겠죠. 이 글이 또 날아가지 않는 한 보람차게 쓴 시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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