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더 행복해지는가? . . .
#0 행복의 조건
친구와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는 본인이 얼마나 다양한 생선과 조리 방법을 알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광어는 지느러미가 기름져서 좋다거나, 연어는 훈제가 아니라 생으로 먹어야 고급이라거나. 그의 아비투스적 현실과는 별개로, 행복해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치 아는만큼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1 조건 판별
회전초밥을 먹는데, 똑같아 보이는 연어초밥이 2종류 있었는데, 하나는 다른 한개에 비해 2배나 비쌌다. 심지어 먹어봐도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 두가지 상품에 대한 지불용의는 동일했다. 하지만 과연 그는 맛을 구분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눈을 가려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 마트에서 잔뜩 산 회와 스시를 그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섞어서 먹여보았다. 그는 해당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틀렸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음식이 아닌 개념을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만족의 비결
고급 와인과 저급 와인을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고전적인 경제학적 생각으로는 단지 저급 와인을 사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더욱 좋은 방법은, 저급 와인을 고급 와인이라고 믿고 소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회 전체의 실질적인 복지의 총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 지속가능하다면.
#3 탐구의 함정
나는 때때로 알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 어느 외국 유튜버가 광화문이 너무나 아름답다며, 14세기의 건축물이라고 소개하거나, 북촌에서 한국의 전통건축을 느낄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하지만, 나는 광화문이 2010년에 완공되었고 북촌은 전통한옥과는 다른 양상으로, 당시 대량생산된 제품이라고 알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가끔은 시골에 엉성하게 지어진 가짜 한옥이나, 서양 건축을 뭔가 단단히 잘못 이해한 것 같은 모텔의 장난스러운 장식용 발코니를 보면 조금 웃음이 난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그것을 보고 정말로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무언가를 분별하는 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4 분별의 의미
아빠는 언제나 건축에서 거짓된 것을 혐오한다고 말했다. 지하에 있는 가짜 창문. 벽돌인 척 하는 벽지...
나는 진실, 그리고 분별하는 힘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에 무지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지는 때때로 아름답고, 가치있다. 나는 그러한 분별력은 무언가를 알게 될 미래의 나에게서, 행복을 빌려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종의 대출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적법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나에게서 행복을 빌려온 것이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단번에 갚을 때가 온다. 이때의 진실은 물론 절대적이지 않지만, 상반되는 복수의 정보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때 채택하게 되는 더 매력적인 이야기를 말한다. 따라서 더욱 진실에 가까울수록(=매력적인 이야기일수록) 만족감이 저하될 위험성은 있지만 수많은 상반된 정보의 풍파 속에서 나중에 갚아야 할 행복의 양을 줄여주어 충격량을 줄여준다. 우리 주변을 행복한 거짓말로만 채우게 된다면 언젠가는 버블 붕괴와 뱅크런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혹시 "거짓말을 끝까지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면,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신용 한계까지 돈을 빌린 뒤 흥청망청 쓰고 한강의 온도를 알고 싶지는 않다.
//3줄요약
- 아는 만큼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만족하는 것이다.
- 그 사이의 격차는 잉여의 행복(물론 음수의 행복도 가능하다)을 생산한다.
- 이러한 요행으로 얻은 행복은 언젠가 갚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