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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의 신 (하편)

왼손잡이해방연대, (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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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민증의 신을 믿었다. 민증의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그가 믿고 기도한 것은 민증의 신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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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민증의 신이란 허구임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필자와 독자 여러분은 물론이고 신자도 알고 있는 점이었다. 과학적으로 민증의 신은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민증 발견의 기적 또한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민증의 신이나 민증 발견의 기적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 점은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명제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여 그 명제를 믿는 일이 언제나 허황되지는 않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중편에서 확인했다. 인간은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면서도 양쪽을 동시에 진실로써 믿을 수 있다. 사실로 증명되거나 반증될 수 없는 허구적 믿음은 세상과 삶과 인간과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비유로서 빛을 낸다. 그 비유는 소립자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소립자가 무한한 격자로 배열된 숫자들과 같다고 말하는 행위와 별반 다를바 없다. 또 영화를 보는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본인도 느끼고 있다고 말하며 영화 주인공처럼 행동하여 자신의 갈등을 풀고자 하는 행위와도 별반 다를바 없다. 필라멘트에서 나오는 빛이 캔버스에 쬐어지고 있다는 설명이 사실적이라면, 무한한 격자로 배열된 숫자들이 곱해지면서 영화관람자가 스크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설명은 허구적이다. 두 설명은 각자의 영역에서 진실로써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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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엉엉 울며 믿고 기도했다. 민증의 신을 믿었고, 민증의 신에게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가 믿는 민증의 신은 무력했다. 민증의 신이 무력한 이유를 사실적으로 설명하자면 민증의 신이 신자의 안에 있고 신자는 무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자가 스스로 인지하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신자가 믿는 진실이 하나 더 있었다. 민증의 신이 무력한 이유를 허구적으로 설명하자면 민증의 신은 누군가의 불러냄에 의해 우연히 혹은 기적적으로 방금 탄생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민증의 신의 신자는 한 명 뿐이었고 또 민증의 신은 민증을 관장할 뿐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무력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민증이 발견되게 하는 기적을 행할 수 있을 뿐이었고 신자가 바라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은 없었다. 민증의 신은 신자만큼 무력했다.

그러니까 신자는 민증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실상은 민증의 신에게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는 기적에 대해 목적어 없이 직접 바란 것이었다. 신자가 민증의 신에게 바란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의 바람을 들을 누군가를 소환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가 민증의 신을 믿으면서 엉엉 운 것은, 단지 부조리 앞에서 공포스러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조리 앞에서 기도하는 행위를 통해 허구의 존재가 자신의 공포를 이해하고 위로를 건내주고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허구의 손길에 따뜻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가 믿은 것은 민증의 신 그 자체라기보다 믿는다는 행위가 세상에 미칠 영향력이었다. 믿음이란 소극적으로 체념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조급한 마음을 억눌러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평온하게 기다리려는 적극적 인내의 행위였다.

신자는 믿었다. 민증의 신만이 아니라 믿음의 힘을 믿은 것이고 또한 기적 그 자체를 믿은 것이다. 신자는 기도했다. 민증의 신에게 바란 것이 아니라 세상에, 또 기적 그 자체에게 직접 바란 것이다. 신자는 울었다. 부조리가 무서워 흘리는 공포의 눈물보다도 그 공포를 자기 안에서 스스로 다스리기 위해 흘리는 위로의 눈물이었다. 또한 그런 위로가 가능하다는 기적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기적들에 대한, 믿음과 기도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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