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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의 신 (중편)

왼손잡이해방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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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증의 신의 유일한 신자는 기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되지 않는 것만이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는 기적을 믿어야 했다. 신자가 기적을 믿은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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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 잘 아는 것은 아는 대로만 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는 대로 행하면 된다는 지식이 바로 앎이기 때문에, 잘 아는 자에게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잘 아는 자가 잘 아는 이유는 아는 대로 행하여 잘 되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는 대로 행하여 원하는 결과가 나온 경험이 있어야만 그것을 잘 안다. 이 사실로부터 나오는 따름정리는,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잘 알지 못한 채로 태어난다는 점이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의 경험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잘 알 수 없다.

방금 태어난 사람은 숨을 쉬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한번도 행한 적이 없는 방법이다. 그는 항상 탯줄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았다. 그러나 탯줄은 그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썩기 시작했다. 그는 살기 위해 숨을 쉬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산소를 공급받을 수 없고,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숨을 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숨을 쉬면 그가 죽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숨을 쉬지 않으면 그가 죽게 됨도 알지 못한다.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하지 못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숨을 쉰다. 알지 못하는 방법을 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비결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속여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숨을 쉰다. 숨을 쉴 용기를 낸다.

그는 스스로를 완벽히 속이지는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동시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아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되었지만 정말로 아는 상태는 아니었다. 아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는 아는 상태와는 다른 것인데 그는 두 상태를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두 상태가 같아야만 용기를 낼 수 있고, 용기를 내야만 숨을 쉴 수 있고, 세상에 나온 이상 숨을 쉬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와 아는 상태는 다름없지만 다르다. 이것은 모순이다. 카뮈는 그것을 부조리라고 일컬었다.

부조리를 마주할 때 인간은 공포심을 느낀다. 공포심을 느끼며 눈물을 쏟고 울부짖는다. 방금 태어난 그는 세상에 나와 첫번째 부조리를 마주한다. 그는 숨을 쉬어야 하지만 숨 쉬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숨 쉬는 방법을 아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도록 스스로를 속인다. 스스로를 속여야만 하는 이 세상은 부조리 그 자체다. 부조리가 공포스러우므로 그는 눈물을 쏟는다. 울부짖는다. 세상의 첫 부조리 앞에서 엉엉 울며 숨을 쉰다. 그 포상으로 그는 숨쉬는 법을 알게 된다. 숨쉬어 살아남는 것을 경험했으므로 그는 이제 숨쉬는 법을 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 이것이 믿는다는 행위의 본질이다. 잘 아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 아는 것은 이미 알고 있고, 아는 상태와 아는 상태는 이미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부조리는 없다. 그러나 부조리가 있는 경우가 있다. 아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는 아는 상태와 완전히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알아야 할 때 아는 체 밖에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부조리다. 인간은 태어나서 첫번째 부조리를 마주한 이후로도 계속 살아간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 채로 태어난다. 인간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알 것을 요구받는다. 수많은 부조리들이 있다. 인간은 그 부조리들 앞에서 매번 믿고, 매번 행하고, 매번 알게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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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많은 부조리를 이겨내왔다.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는 체하면서 행하여 그것들을 알게 됐다. 그런 것이 많았다. 많이 믿고 많이 행하여 많이 알게 되었다. 그는 여태까지 그 과정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수행해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태어난 직후에 직면했던 첫 부조리 앞에서 숨을 쉬는 방법을 믿고 행하여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숨을 쉬어야 했던 그 순간을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무의식에 믿고 행하고 알게 되는 과정이 새겨져있다.

민증의 신을 증거하는 기적을 신자가 목격한 순간에 그는 하나의 거대한 부조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길 바랐다. 그는 그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왜냐하면 카뮈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부조리에 저항해야 했고, 신자는 카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동분서주 끝에 알게 된 것은 그가 그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부조리에 저항하는 일이 부조리했다. 왜냐하면 부조리에 저항하려고 하는 일은 부조리를 키울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저항이 인간의 이해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저항 또한 세상에 속하였다. 세상에 속하는 것은 모두 부조리하다. 저항은 부조리했다. 이것은 그가 목격한 적이 없는 가장 거대한 부조리였다.

신비하게도 세상은 가혹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가혹하고자 하여 가혹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의지가 없다. 세상이 가혹한 것은 단지 가혹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일부러 가혹해지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혹하지 않은 때에는 가혹하지 않기도 하다.

그 찰나의 순간 세상은 신자에게서 가혹함을 거두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사건은 신자에게 믿음을 요구했다. 그것은 어떤 계시처럼 내린 문장이었다. 그때부터 그 사건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이 기적임을 인정하지 못했다. 기적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는 그 기적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는 기적이 기적임을 인정해야 했다.

민증의 신을 부르자 민증이 발견된 그 사건을 목격했을 때 그가 이해하지 않기로 하고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해하지 않기로 한 것은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또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해해야 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기적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즉 모든 기적은 본질적으로 기적임을 그는 알아야만 했다. 그의 요구에 의해 기적은 목격되었다. 목격된 것으로 되었다. 그는 기적을 목격하는 방법을 믿고 행했고 알게 되었다.

그는 어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그 기적이 일어나려면 그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행해야 했다. 그는 그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행할 수 없었다. 행할 수 없는데 행해야 했다. 부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카뮈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저항은 부조리를 키우는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조리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믿었다.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행하기 위해서는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아는 체 해야 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 해야 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을 믿어야 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이 기적이 일어나게 한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기적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적과 믿음의 신비한 수학적 구조를 발견한다. 기적의 방정식의 자명한 해는 믿음이다.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 = 믿음"을 대입해보면 방정식이 재귀적으로 참이 됨을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기적이 일어난다." 재귀적으로 참이 되는 문장은 인간의 이해 안에서는 알 수 없다. 그런 종류의 문장은 무한한 논증을 요구한다. 무한한 논증은 이해 너머의 앎, 즉 믿음이다.

그는 믿음의 힘을 알지 못하지만 아는 체 했다. 믿음의 힘을 믿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믿었다. 자신이 원하는 그 사건이 이해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그 사건이란 기적임을, 따라서 그가 행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 뿐임을 믿기로 했다.

믿음은 언제나 부조리 앞에서 요구된다. 믿는 일이란, 부조리에 저항할 수 없고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부조리한 행위다. 부조리 자체도 공포스럽지만, 부조리에 저항할 수 없고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부조리는 더욱더 공포스럽다. 그래서 믿음은 부조리 그 자체보다도 공포스러운 일이다. 신자는 믿으며 눈물 흘리고 울부짖었다. 믿음의 힘을 알지 못하면서도 믿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신자는 태어나서 처음 믿던 그때처럼 그저 믿으며 엉엉 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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