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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귀타인

왼손잡이해방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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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게조차 나는 타인이다.

이대열의 책 <<지능의 탄생>>은 자아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학글쓰기 수업에서 읽고 한번도 다시 펴보지 않은 책이므로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다음과 같다.

진화심리학에서 말하기를 인간의 자아는 타인을 해석하기 위한 기술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밖에서는 살 수 없으므로 사회 안에 있기 위해 온몸으로 발버둥친다. 사회 밖에서는 살 수 없으므로 사회 안에 잘 녹아들 수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사회 안에 잘 녹아들 수 있으려면 타인을 이해해야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저 사람이 이 일을 해줄지, 저 사람은 여기서 어떻게 행동할지, 저 사람은 어떨 때 저런 행동을 하는지,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런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사람들만이 사회에서 살아남았다.

이런 문제들을 푸는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마음의 모델이 생겼다. 요컨대 이런 이론이다: 사람은 내부에 마음이라는 상태 및 결정체계가 있어서, 그 사람의 기질적인 성격과 살아가며 겪는 경험이 뒤섞여 만들어진 이 마음이라는 상태에 따라,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 행동을 결정하여 수행한다. 이 이론에 따라 사람은 타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타인의 마음은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고 그 행동을 잘 해석하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추정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음 모델은 눈 앞의 사람을 읽기 위한 기술로 고안되었다. 이 기술은 사람을 만날 때면 자동적으로 발동되어 눈 앞의 사람을 읽는다. 재미있는 포인트는 눈 뒤에도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눈 뒤의 사람이란 바로 자기자신이다. 사람은 항상 스스로를 만나고 있다. 사람은 항상 스스로를 만나고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발동된 마음 모델에 의해 눈 뒤의 사람을 읽는다. 그 마음 모델이 바로 자아다. 자아란 스스로를 마음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하는 합리적 체계다.

여기부터는 나의 생각이다.

눈 뒤의 사람을 읽으며 답하고 있는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일을 하게 될지, 내가 여기서 어떻게 행동할지, 나는 어떨 때 이런 행동을 하는지,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늘어놓고 보니 참 혼란스러워하는 질문들이다. 아마 평소에는 이 질문들을 떠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긴 시간 스스로를 봐왔다. 이미 자아는 불수의근이 되었다. 스스로의 마음 모델은 엄청난 정확도로 스스로의 행동을 예측한다. 그 마음 모델은 또렷한 목소리를 낸다. 마음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마음이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사람은 혼란스러워하는 질문들을 한다. 왜 혼란스러운 사람은 혼란스러워하는 질문들을 하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오랜 시간 분석해서 만든 마음 모델이 실제 나의 행동을 다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행동과 반응이 낯설고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에는 여러 이름이 있다.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복종하기로 하면 신이 된다.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무찔러 없애기로 하면 괴물이 된다. 현대적인 이름을 붙이자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방인이라고 일컫는다.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이라는 책도 있다. 교양 참고문헌이었을 뿐이므로 얼마나 정확한 인용인지는 모른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방인이다. 모두가 이방인은 아니지만, 꽤 많은 사람이 이방인이다. 적어도 그 사실이 여러차례 책으로 발간되어 그것들이 모두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이방인이다. 알베르 카뮈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어 끔찍한 낯섦을 느끼게 된 사람, 세상에 불청객으로 온 것처럼 느끼는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일컬었다. 정말 무섭고도 슬픈 사실은, 이방인 자신의 마음조차도 언제든지 이방인에게 낯섦을 선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세상의 한 조각이라는 점이다.

마음 모델은 마음이 아니다. 예전에 교양 수업 토론에서 누가 "이론은 이론이니까 당연히 현실과 다르죠"라고 해서 발끈한 적이 있다. 나는 "이론이 현실과 다르면 이론을 고쳐야죠"라고 말했다. 지금은 이론이 절대로 현실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아마 수학적 진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론이 현실과 다르면 이론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적어도 컴퓨터 이론에서는 그러했다. 그래도 결국은 현실과 타협을 해서 이론적으로 정확하지 않지만 대충 돌아가는 뭔가를 만들어야만 했지만 말이다. 이야기가 샜다.

마음 모델은 마음과 맞지 않는다. 마음 모델은 이론이고 마음의 결정과 행동은 이론을 모른채 일어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마 누구나 자신에게 낯선 순간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타인에게 환상을 들이밀지 말 것. 완벽해보이는 누군가도 어딘가에서 개고생을 하고 있다. 흐리멍텅해보이는 누군가도 실은 자기 삶을 착실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다들 이방인이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여태까지 마음이 정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확실히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음은 있다. 아마도 놀라우리만치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란 쉽게 이해할만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를 읽으며 마음이 얼마나 불가해하고 숨기고 속이는 것이 많은지, 그리고 그것을 다 까발렸을 때 얼마나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어버리는지 목격하고 말았다.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소설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 무서운 소설이다. 읽으면서 나는 더 투명해지지 않았을까. 아주 적나라하고 쪽팔린 삶이 될 것만 같다. 나도 여전히 내 마음을 모른다. 하지만 몇날며칠 곱씹다보면 이렇게가 아니고서는 더 적나라할 수 없을만큼, 심장이 뜨끔하다못해 수만마리 고슴도치의 열렬한 포옹을 받는듯한 그런 기분으로 스스로 까발려버리는 순간들이 올 것이다. 쪽팔리겠지? 나는 쪽팔려도 살 수 있다. 삶이 별건가?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지. 그리고 그 순간들은 속시원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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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이 맑아지는 기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