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좀 디자인 해줘. 어떻게 해야 좋은거야?" 건축을 전공한다고 하면 주변인 중에 이런식으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대답이다.
...
#1 동경했던 지식
나는 잘 정의된 지식에 대해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설명 가능한 지식.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지식말이다. 그러한 지식은 자신의 모든 경험을 나열하지 않고도 순식간에 타인에게 핵심을 전달할 수 있다.
내가 동경했던 학문은 이를테면 이런것이다.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서는 모든 상품을 더 비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국가가 있더라도 함께 기회비용이 더 적은 상품을 생산하고 교역을 통해 함께 이득을 볼 수 있다.
a. 비교우위가 있다면 교역을 통해 경제 전체 파이를 키울 수 있다.
b. (경제의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교역을 해야한다.
분명한 지식과 원리(a)로부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주장(b)을 할 수 있는 것을 원했다.
반면에 알아갈수록 알 수 없고 단지 수많은 경험과 사례의 나열만이 반복되는 것들도 있다.
철학자에게 물어보자. "선이란 무엇인가요?"
온갖 말들을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정확히 무엇이라고 표현되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2 침실의 조건
침실이란 무엇일까? 여러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다.
A. 잠을 자기 위한 방.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단지 지금껏 보아온 유형을 떠올릴 뿐일지도 모른다.
대학동기가 일종의 주택을 설계하는 과제를 하다가 다음과 같은 침실의 평면도를 그린적이 있었다. (디테일은 좀 다를 수 있지만 일단 핵심은 그러했다)
(그림1)
틀린말은 아니었다. 침대가 있고, 침대에 접근할 수 있는 접근로를 확보하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다른 프로그램들과의 공간적 모순과 충돌을 해결하다가 나온 기형적인 방인것은 분명해보였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아직 명확하게 반박할 무기가 없었다. 직감만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형식의 방이 있어도 성립할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직감은 근거가 있었을까? 지금 떠오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창이 있어야 채광과 산소 공급을 위한 환기가 가능하다.
-침대는 측면에서 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래의 사례가 있다.
(그림2)
...이것은 침실이었다. 2층침대가 대칭적으로 설치되어있고, 침대 아래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다. 출입문은 없다. 그 당시의 나는 이것이 가능한 배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선 (그림1)에서의 평면과 다른점이 정말로 있는가?
-우선 창은 있다. 그러나 열리는 창이 아니다. 환기는 외부 거실로부터 상시 이루어진다. (사실 벽면이 천장과 이어지지 않는다.)
-침대의 측면은 난간이며 출입은 불가능하다.
앞선 문제들이 기형적으로 해결되어 있거나, 무시되어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침실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1인당 전용하는 면적도 계단을 제외하면 그다지 넓어지지 않았다. 심리적인 공간감? 단순히 학습된 무기력으로부터 기인한 체념일까?
아래의 예시도 확인해보자.
(그림3)
...이것은 8인이 함께 생활하는 셰어하우스(?)의 실제 사례이다. 앞선 예시들에 비하면 1인당 전용면적이 매우 사치스럽다. 나는 이것도 일단은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그럴까?
다음은 건축계획(성안당, 2024)에서 제시된 침실의 조건이다.
침대의 배치.
-침대의 상부 머리쪽은 되도록 외벽에 면하도록 할 것.
-누운 채로 출입문이 직접 보이도록 할 것.
-침대 양쪽에 통로를 두고, 한쪽을 75cm 이상이 되게 할 것.
-침대 하부인 발치 하단에는 90cm 이상의 여유를 둘 것.
-침실 내에서의 주요 통로 폭은 90cm 이상이 되도록 할 것.
(그림4)
아주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기는 하다. 단순한 위치관계나 유무뿐 아니라 엄밀한 수치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면 관습적이고 규범적인 주장이다. 한정된 자원과 좁은 1인당 면적이 익숙해진 나머지,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을때 어떻게 흘러갈것인지에 대해 마음대로 전제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림5)
여기서 (E)와 (F)는 규칙을 준수하고 있지만 (G)는 벗어나있다. 석연치않은 불편함이 생기지만 이유는 모른다. 엄밀해보였던 건축계획 원칙도, 사실 내면에 존재했던 불분명한 규칙들을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분명한 규칙은 어딘가 불충분하고, 불분명한 직감은 어딘가 설명되지 않는다.
한옥을 떠올려보면 처음부터 침대가 필요하지 않다. 침실에 침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조차 관습적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걸까?
"침대가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고... 나는 좀 작은 침실을 좋아하는데 너는 혹시 다다미 넉장 반이 좁니? 고시원은 좁지만 입지조건은 좋을수도 있고...아닐수도 있고.."
이것만으로는 당신의 침실을 만들 수 없다.
#3 침실의 의미
언제부터 이렇게 건축가가 무의미한 직업처럼 보여지게 된것일까? 단지 건축주의 취향을 실현하는 일일까? 건축가인 야마모토 리켄은 한국 사회가 한국 건축가들의 손발을 묶고있다고 주장한적이 있다. 나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어쩌면 무엇이 좋은 세상인지는 불분명한 직감과 취향일 뿐이다. 이런것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을 외부효과로 설명하고자 한다. 20세기 미국, 각자 자동차를 소유하고 싶어했던 결과, 교외도시는 비대해졌고 자동차를 위한 도시가 탄생했다. 이제 미국은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유명해졌다. 각자 원하는 것을 했지만, 돌고돌아 자신을 위한것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커뮤니티가 파괴되고 서로를 기피하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차가운 도시를 원했다. 시장원리에 의해 건설사들은 사람들의 욕망을 들어주었다. 사람들은 건축가들의 주장을 건축가 개인의 취향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부실공사된 건물의 가격에는 무너진 건물의 피해액이 반영되어있는가? 각자의 성을 쌓고 다른 집단을 배척하는 단지에는 무너지는 사회에 대한 아픔이 반영되어있는가...
이케아에서 나오는 Life At Home 2023 보고서에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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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휴식을 위한곳이다 53%(전세계 최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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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가르치며 자긍심을 갖는다 8%(전세계 최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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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웃음이 생활의 즐거움을 준다 14%(전세계 최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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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시간을 보내는것이 집에서의 가장 큰 즐거움 40%(전세계 1위)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사회였다면 상관없다. 건축가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이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에게 달렸다. 그래서 나는 반대로 묻고싶다.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건축을 구매하고 소비하고 있는가.
당신의 침실을 정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