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소설의 이해”라는 이름의 수업을 듣고 있다. 이번주 주제는 ‘세계와 이데올로기 -- 거대 담론 이후’라고 올라와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제목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허영심이다. “깨어있다”라는 자의식이다.
그러나 허영심만은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거대담론은 내 대학생활에서 도려나있다. 내가 학생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기 때문일까? 정치, 소외, 복지, 안보, 비리, 도덕, 노동, 소수자, 혐오, 역사... 모두가 무관심하거나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일테다...
종교도 그 리스트에 있었다. 그래도 종교는 좀 녹아든 것 같다고 느낀다. 나는 무관심하고 싫어하는 편이었다. 어느날의 미묘한 바람으로 관심을 가져보니 꽤 재미있는 영역이었다. 철학의 본고장 같은 곳. 철학은 재밌어하는 편이었으니까 쉽게 전이가 된 것 같다. 가끔 종교에 관해 말을 꺼낸다. 공포의 크기에 비해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주제다.
정치는 더 미묘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정치의 풍경은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고 욕지거리하고 테러하고 정책 실패와 부도덕성을 고발하는 현장 뿐이다. 분명 삶과 질서와 인간에 대한 꿈이 있을텐데 그것은 심해만큼 짙은 가십에 깊이 가라앉아있다. 우리는 분명 정치에 대해 더 생각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다퉈야 한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의사를 결정해야한다. 그런 일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느낌이 심히 불쾌하고 수상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비트겐슈타인은 젊을 때 그렇게 말하고는 말년에 자신의 이론을 번복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고 한다.
21세기 한국소설의 이해 수업은 어느새 거대담론을 지나고 있다. 5.18, 6월 항쟁, 일본군 “위안부” 등.... 국가가 잘못하고 은폐하고 소외시키는 사람들. 그들에 대해 소설을 쓰는 것은 언제나 얼마간의 왜곡이 들어가고 현실에 못 미친다. 그럼에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말해라.”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하는 것만이 이해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는 일이다.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그 꿈을 계속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에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고 싶어지는 절망감이다. 하지만 이해란 해석학적으로 극한과 같은 것이다. 모든 델타에 대해 언제나 엡실론이 있어 너의 진실에 나의 이해가 무한히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 불완전하고도 온전한 진리다.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이방인이 된다. 낯선 것, 그것은 어떨 때는 괴물, 어떨 때는 신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것은 괴물일 때도 신이 되려 하고 신일 때도 여전히 괴물이다. 이해를 포기한 것에 대해서 인간은 맹종하거나 혐오하게 된다. 유물론자가 종교인을 업신여기고, 종교인이 이교도를 업신여긴다. 또는 번쩍거리는 사기꾼에게 천금만금을 거리낌없이 내주고, 부도덕한 이에게 나라의 미래를 맡긴다. 번호가 다른 사람, 좋아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말로써 글로써 서로 가루가 되고 재가 될 때까지 쥐어팬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저렇게 말하는 김땡땡 씨는 어떤 삶을 살아서, 어제 무슨 말을 듣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어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세상에 정말로 이상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공감을 시도할 기력조차 모조리 빨아내가는 이 세상도 문제겠지만 말이다....
내일 수업을 기대하며 웅장해진 가슴에거 바람 좀 빼고 자보자 하여 이렇게 글을 썼다. 어떻게 마치면 좋을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자! 그러려면 좀 더 많이 대화하고 좀 더 많이 다투고 좀 더 많이 화해하자. 그리고 정치 얘기를 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 남북관계와 한미일중 관계, 성소수자 혐오 문제와 역사왜곡 문제, 언론 탄압, 권력 남용, 청년 정치 참여, R&D 예산 삭감, 게임을 즐길 권리, 전현 대통령의 공과 과, 차기 대선 후보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즐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