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해방연대 아지트

사용자 확인중...

세벌식

왼손잡이해방연대,

33

1

아지트가 꽤 오랜 시간 죽어있었습니다. 삼주 정도 지났는데 그간의 소식을 차차 풀어보아야겠죠.

이번 글에서 다룰 첫번째 소식은 "세벌식"입니다. 세벌식, 초등학교 때 한컴타자연습을 재밌게 하셨다면 들어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세벌식은 한글 키보드 배열의 한 종류입니다. 세벌식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제가 며칠간 연습해서 쓰고있는 배열은 아래 사진과 같은 세벌식390입니다.

(사진: 세벌식을 씁시다)

한글 자모들이 이상한 곳에 위치해있고 심지어 어떤 것들은 두개씩 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 자판을 세벌식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두벌식은 왼쪽에 자음, 오른쪽에 모음을 두지만 세벌식에서는 오른쪽부터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로 세 구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음은 기본적으로 오른쪽에 한벌, 왼쪽에 한벌이 있습니다.

왜 이런 기묘한 자판을 쓰려고 하나 싶으실텐데요, 표면적인 이유는 세벌식이 한글 타자를 치는 데 있어 효율적이고 빠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벌식의 팬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 그 정도로 숙달되지 않아서 두벌식으로 치던 속도의 절반도 나오지 않습니다.) 세벌식의 창시자인 공병우는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배열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 끝에 세벌식390을 발표했습니다. 배열을 의식하면서 치면 그런 고민을 한 흔적이 묻어나옵니다. 가장 쓰기 좋은 검지손가락에 할당된 글쇠를 보면 그렇습니다. 오른손에는 'ㅇ', 왼손에는 'ㅏ'가 있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소리들이죠. 이중모음으로 결합이 되는 'ㅗ', 'ㅜ'는 쉽게 연계해서 칠 수 있도록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하나씩 더 배치가 되어있는 점도 그렇습니다.

가끔 아쉬운 점은 끝소리 'ㅎ', 'ㅈ'의 위치입니다. 제 새끼 손가락이 유독 짧아서 그런지 몰라도 매번 손을 움직여야 합니다. 기본 자리 윗윗줄에 있는 'ㅑ', 'ㅢ', 'ㅜ'도 항상 에임이 맞지를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ㅖ'나 'ㅋ'은 잘 맞는데 말이죠. 'ㅛ'와 'ㅠ'는 그냥 헷갈립니다. 이런저런 불편사항들은 아마 공병우가 배열을 너무 고민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려버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불편점을 개선한 '세벌식391'도 있습니다만 일단은 사람들이 더 많이 쓰는 390을 선택했습니다. 390이 익숙해지면 391도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좀 더 숙달이 되면 '모아치기'도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세벌식입니다. 말 그대로 한글 한 글자를 모아서 칠 수 있습니다. 첫소리와 끝소리가 구분이 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거죠. 글쇠의 자리들을 더 잘 외우게 되면 슬슬 시도해보겠습니다.

세벌식을 연습하기 위해 타자연습 사이트들도 찾아봤습니다. 타자연습 소프트웨어의 고전인 한컴 타자연습을 찾아봤지만, 웹으로 리뉴얼된 한컴 타자연습은 옛날 그 감성이 아니었습니다. 왜 세상은 점점 짜치는 모습이 되어갈까 생각이 들면서도 그냥 제가 시대를 지나온 것뿐이라는 결론이 납니다. 디자인이 별로인데다가 연습용 텍스트도 다 무슨 남자 아이돌 노래 가사가 되어있고 자체 세벌식 입력기는 버그 투성이입니다.

잠깐 더 찾아보니 2024년다운 사이트가 있었습니다. typing.works라는 사이트입니다. 자리연습이나 자체 입력기는 없지만, 미니멀한 디자인과 웹소설부터 에세이, 현대시에 이르는 다양한 텍스트들을 사용자가 업로드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리포트를 이미지로 내보내는 기능도 있습니다.

가끔은 타자속도 측정없이 집에 있는 시집을 보고 vim에다가 연습하기도 합니다. 집에 있는 시집이래봐야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의 기형도 시집 한 편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코파일럿이 켜져있어서 자꾸 시의 뒷내용을 예측하려 드는데 한 어절도 제대로 맞히지를 못합니다. 코딩 AI라 그런 것도 있지만 어쨌든 갈길이 먼 것 같습니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아직 시효가 좀 더 남아있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AI가 없어도 좀 위태위태한 이미지의 직업 또한 시인입니다.

이 시집은 어느날 갑자기 별 이유 없이 사게 된 것인데요, 책장 한켠을 장식할 뿐이던 이 책이 이제야 빛을 발합니다. 타자연습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시를 읽을 때에는 리듬감, 즉 운율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거야 당연한 얘기 같기도 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를 속으로 읽어서는 그 시를 100% 즐길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인마다 시마다 비중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시란 줄거리나 상징, 비유에 앞서 운율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상의 시처럼 가끔은 시의 모양이 중요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소리내어 시간선 위에 한 줄로 늘어트려야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죠.

소리내어 읽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시를 타자로 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치면서는 느낄 수 없는 운율감, 리듬감이 있습니다. 시집의 시는 가만히 인쇄되어 있는 글이지만, 시간의 강에 풀면 입체적으로 살아나 동작을 이루고 춤을 추는 듯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생각하니 역시 시는 소리내어 읽어야할 겁니다. 단순히 시간에 실어보내는 것에 더해 소리의 조합이 입에서 만들어지는 재미도 찾을 수 있을테니까요.

이렇게 오늘은 세벌식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듯 말했지만 본심은 그냥 사람들이 안 쓰는 힙스터스러운 기술을 배워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vim, tmux, arch, 세벌식 let's go!"라는 느낌이죠. 이런건 뭔가 업무를 효율화한다든지 삶을 윤택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재미있는 소일거리죠. 이제 사람들이 제 노트북이나 컴퓨터를 쓰기 어려워졌을 뿐입니다. 시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생긴 것은 좋네요.

첨부파일


목록

세벌식 붐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