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해방연대 아지트

사용자 확인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종교학적 분석

왼손잡이해방연대, (개정: )

54

0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은 작년 1학기에 종교와 영화 중간 대체 리포트로 낸 글이다. 그 때 종강하고 올린다고 해놓고는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올린다.

1. 서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1]는 다중우주라는 소재를 통해 허무주의의 문제를 제시하고, 사랑을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에블린은 미국에 정착한 중국인 이민자로, 남편 웨이먼드, 딸 조이,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빨래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가족과의 소통 단절 문제를 안고 있다. 그녀가 세무조사를 위해 세무서에 출석하는 날, 다른 평행우주인 알파버스에서 알파 웨이먼드가 찾아온다. 알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다중우주의 운명을 위협하는 조부 투파키와 싸울 것을 요구한다. 에블린은 서로 다른 평행우주를 넘어 다니는 버스점프 기술을 사용해 조부 투파키와 싸운다. 그러다 조부 투파키의 정체가 조이임을 알게 된다. 또한 조이가 허 무주의로 인해 다중우주를 위협하는 에브리씽 베이글에 에블린도 현혹되게 된다.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도움을 받아 조이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화목한 가족으로 돌아간다.

일반적으로 영화라는 매체는 종교적인 특징을 가진다. 즉 영화를 종교학의 도구로 해석할 때 더욱 풍부한 의미와 가치 체계를 찾아낼 수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종교 철학 내지는 “세계관 철학”[2]의 형태를 띤 질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질문에는 말 그대로 종교가 전통적으로 가장 풍부한 답변을 제공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종교학의 도구를 통해 바라보면 영화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과 그 효과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보고서에서는 감각적 비평을 통해 영화의 시청각적 효과가 자아내는 경험이 신화로써의 영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기여함을 확인한다. 이어서 신화적 비평을 통해 대사에 직접적으로 설명된 설정과 철학이 메시지의 매체로써의 신화를 보충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신화적 구조를 웬디 도니거가 제시한 렌즈의 유비를 통해 살펴본다. 이러한 비평을 통해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일종의 종교로 다가설 가능성을 알아본다.

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유발하는 감정적 고양감 경험

누미노제 경험이란 “두려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매혹적이기도 한, 신비에 대한 경험”을 말한다. 누미노제 경험을 제시한 루돌프 오토에 따르면 이러한 누미노제 경험은 종교의 핵심이다.[3]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관객에게 유 발하는 감정적인 경험도 종교의 누미노제 경험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특히 감정적 고양감이 유발되는 부분은 반복하여 강화되는 다중우주 편재 장면이다.

이 영화는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처럼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평행우주에 편재하 며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경험을 독특한 방식으로 스크린에 구현한다. 첫 번째 편재 장면[4]에서는 에블린이 존재하는 여러 평행우주를 배경으로 에블린의 얼굴을 비슷한 구도로 클로즈업하여 짧은 시간에 빠르게 전환한다. 또한 낮고 날카로운 소리로 낮은 울림과 날카로운 고음을 함께 재생하며 에블린이 겪는 두통과 혼란, 두려움을 청각적으로 표현한다. 전환이 끝났을 때 에블린은 일상 평행우주의 집에 앉아 안정을 찾는다. 이 장면에서는 특별히 감정적인 고양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단지 자극적인 시각 및 청각 효과로 약간의 불편감을 일으킬 뿐이다.

두 번째 편재는 에블린이 세 평행우주를 교차하며 웨이먼드를 괴롭히는 장면이다.[5] 전투 평행우주, 일상 평행우주, 배우 평행우주를 무작위로 빠르게 전환하면서 웨이먼 드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비춘다. 이때 웨이먼드는 볼이나 멱살을 잡히거나 에블린 이 집어던진 과자를 맞는 등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모욕당한다. 마침내 빠른 전환이 멈추고 전투 평행우주에서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배를 찔리는 장면으로 정착할 때 관객은 웨이먼드의 당혹감과 슬픔에, 또 에블린의 무력감과 절망감에 첫 번째 편재 장면보다 조금 더 깊이 이입하게 된다.

세 번째 편재는 두 번째 편재 직후에 에블린이 비명을 지르며 시작된다.[6] 회전하는 조명이 클로즈업된 에블린의 절망하는 얼굴을 비춤과 동시에 이전의 두 편재 장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화면을 전환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두 편재 장면에서는 이미 앞에서 보여주었던 평행우주만이 배경으로 나오는 반면, 세 번째 편재 장면에서는 매우 다양한 옷차림과 얼굴 변장을 보여주며 기상천외한 이미지와 그림체의 배경을 교차한다. 청각적으로는 에블린의 비명과 함께 음악과 도시의 잡음을 마구 잘라 뒤섞은 듯한 효과음이 재생된다. 마침내 전환이 멈추고 일상 평행우주의 에블린이 쓰러질 때 관객은 에블린이 모든 평행우주를 경험하며 느꼈을 절망적인 고양감에 이입하게 된다.

앞의 세 다중우주 전환이 에블린의 혼란과 절망을 높여가며 자극적인 시청각 효과 로 감정을 이끌어냈다면, 네 번째 다중우주 전환은 관객에게 안도감을 주는 방식으로 보다 잔잔하게 감동을 이끌어낸다.[7] 이 장면에서는 전처럼 정신없는 전환을 보여주지 않는다. 에블린의 얼굴에 비친 빛이 천천히 회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전 장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구도도 강박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맞잡은 손을 클로즈업하거나, 둘을 롱샷으로 담거나 하고, 회상 장면도 교차시키고 화면비도 바꾸어가며 관객에게 감각적인 여유를 준다. 마침내 일상 평행우주에서 포옹하며 화해하는 장면은 이전의 편재 장면과 대비되어 더 큰 감동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장면들은 에블린이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하며 느끼는 허무주의와, 웨이먼드를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에블린의 경험을 극적인 연출을 통해 관객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종교 의례도 “이러한 감정을 표현하고 유발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유럽에 있는 대성당의 첨탑들, 그안의 희미한 불빛들, 높이 울려 퍼지는 성가대의 노랫소리, (...)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만물의 주에 대해, 경이로운 신에 대해 느끼게 해준다.”[8] 관객들은 다중우주의 편재라는 일상적으로 느낄 수 없는 감각을 영화를 통해 느낌으로써 에블린이 경험한 ‘신화’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3.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 대사의 교리적 기능

이 영화는 소위 맥시멀리즘 영화이다. 앞에서 살펴봤듯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갈등 구조와 시청각적으로 정신없을 만큼 풍부한 연출이 들어가 있다. 거기에 수많은 영화 작품과 장르의 오마주, 영어와 중국어의 다국어 대사, 자극적인 액션과 코미디 요소가 관객을 더 정신없게 한다. 그 때문에 관객에 따라 이 영화를 단순히 웃긴 코미디 영화로 보거나, 성소수자나 이민자 문제 등 국소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출 여지가 있다. 한편 이 영화에서는 대부분의 설정과 철학을 대사를 통해 부연 설명한다. 이는 감독이 영화에 많은 요소를 담으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이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정한 장치로 보인다.

이렇게 영화 스스로 신화와 감각적 경험을 보충하는 구체적인 설명을 대사의 텍스트로 갖고 있는 것은 종교가 교리를 통해 주장하는 바를 체계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니니안이 제시한 교리의 기능에 빗대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첫째로 교리는 “신화와 종교 경험의 형태로 전승되는 자료들을 일관성 있게 정리해 주는 기능을 한다.”[9]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조화했듯, 영화가 설명하는 다중우주와 정신의 파편화에 대한 설정과 조이의 대사로 작중 인물들이 허무주의에 빠지는 이유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교리의 두 번째 기능은 “종교 상징들이 어떻게 그 자체를 넘어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가리키는지” 밝히는 것이다.[10] 영화에서 검은 베이글을 숭배하는 컬트 집단이나 인형 눈알을 던지며 싸우는 장면은 그 소재 자체만 놓고 보면 전혀 말도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조이의 대사를 통해 에브리씽 베이글이 허무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을 듣고, 웨이먼드의 대사를 통해 인형 눈알이 웨이먼드의 다정하고 긍정적인 시선의 상징이라는 것을 유추하면서 영화를 본다. 따라서 이 영화는 베이글 앞에서 사람들에게 인형 눈알을 던지는 이상한 장면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폭력 대신 다정함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교훈적 신화로 탈바꿈한다.

교리의 세 번째, 네 번째 기능인 전통의 재해석과 세계에 대한 전망[11]은 종교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으키는 상호작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최근에 개봉한 이 영화에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대사가 교리의 세 번째, 네 번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시대 정신이 바뀌어 영화의 해석이 달라지거나 영화가 시대 정신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후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기능인 공동체의 경계 설정[12]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영화의 관객끼리 느슨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에 대응시킬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크게 감동하고 여러 번 재관람하면서 영화에 나온 상징들을 재생산하는 사람들은 세계관이 서로 비슷함을 인지하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4. 신화적 렌즈를 통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제 분석

이 영화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갈등 구조는 웬디 도니거가 사용한 현미경과 망원경 렌즈의 유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연속체 가운데서 신화는 진동한다.”[13] 이 영화의 갈등도 아주 일상적이고 친숙한 장면을 비추는 현미경 렌즈와 근본적이고 심오한 우주적 문제를 비추는 망원경 렌즈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전개된다.

영화의 1부는 에블린이 처해있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에블린은 세무조사를 위해 수많은 영수증을 정리하지만 세무조사관인 디어드라에게 무수한 지적을 받는다. 남편 웨이먼드는 에블린과 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혼 서류를 건네지만 이내 에블린이 대화할 여유가 없음을 알고 다시 빼앗는다. 동성애자인 딸 조이는 에블린이 자신의 여자친구 베키를 인정해주길 바라지만 에블린은 그 문제를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이처럼 영화는 현미경 렌즈를 통해 정신없고 어느것 하나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에블린의 일상 세계에서 디어드라와의 세무조사, 웨이먼드와의 이혼, 조이의 성정체성 인정 문제를 비춘다.

세무서를 찾아간 에블린에게는 다중우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거대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웨이먼드에 빙의하여 나타난 알파 웨이먼드의 지시를 시작으로 조이에게 빙의하여 온 다중우주를 위협하는 조부 투파키를 막아내는 대결이 펼쳐진다. 또, 알파버스에서 온 전투원들이 조이를 죽여 조부의 빙의를 원천차단하려 하자, 에블린은 이번엔 알파버스에 맞서 조이를 지킨다. 이처럼 영화는 망원경 렌즈를 통해 다중우주의 운명을 건 거대한 문제를 비춘다.

영화는 렌즈를 끊임없이 바꾸어가며 진행된다. 망원경 렌즈로 전투 평행우주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대결을 주로 비추면서 중간중간 현미경 렌즈를 통해 일상적 문제를 다루는 일상 평행우주를 비추기도 한다. 렌즈가 바뀌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두 평행우주를 오갈 때마다 스크린의 비율도 2.35:1과 1.85:1을 오간다.

2부에서는 신화에 나타난 신학적 렌즈처럼 영화의 렌즈들이 서로 맞물리는 모습을 보인다. 에블린은 베이글 홀에서 조부 투파키와 대화하면서 조이와 조부 투파키가 분리되지 않는 단일한 인격체임을 알게 된다. 이후 조이의 회의주의적 사상에 설득된 에블린이 모든 평행우주를 파괴하려 들자 웨이먼드가 그녀를 막아서며 ‘다정함’의 힘을 설파한다. 웨이먼드와 에블린은 다정함으로 디어드라에게서 세무조사의 유예기간을 얻고 똑같은 다정함으로 에블린은 조이와 그 추종자들에게도 맞선다. 그전까지 완전히 개별적이었던 세 개의 현미경 렌즈와 하나의 망원경 렌즈가 서로 맞물리면서 다정함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한다. 이는 신화에서 양극단의 렌즈가 동시에 맞물리며 “독특한 이중 시각을 요구”[14]하는 것과 유사하다.

에블린과 조이가 마주했던 에브리씽 베이글은 신화에 나타나는 “엄청난 스케일의 신학적 비전”으로 유비될 수 있다.

[신화에] 드러난 엄청난 스케일의 신학적 비전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모든 인 간사를 하찮게 보이게 위협할 수도 있다. (...) 신화는 우리가 이 신학적 비전을 받아들이길 요구하지 않는다. 심지어 텍스트 안에서도 등장인물들은 평범한 일상의 세계에 안착한다. 그러나 신화가 반드시 이 결말이 앞선 비전에 비해 훨씬 더 실재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은 아니다. 반대로 신화의 목적은 우리의 삶이 실재라는 것을 보는 동시에 실재가 아니라 는 것을 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15]

에블린과 조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올라간 에브리씽 베이글을 바라볼 때 그 거대함 에 압도되어 “다 부질없다”[16]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다정해야 한다”[17]는 자신만의 가치관을 이야기한다. 그가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허무주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 평행우주에서 웨이먼드가 하는 대사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그랬지. 세상은 잔인하고 우리는 쳇바퀴 돌 듯이 살 뿐이라고. 나도 알아. 나도 당신처럼 살 만큼 살았어.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전략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지. 나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았어. 당신은 자신을 투사로 여기잖아. 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이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18]

“고개만 돌리면 모두 외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조이와 달리 웨이먼드는 세상의 잔인함과 삶의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긍정적이고 다정한 시선을 통해 거대한 허무주의만큼이나 인간사의 일상도 실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허무주의의 실재와 일상의 실재 사이에서 웨이먼드는 둘 다 동시에 존재한다고 대답한다.

5. 결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다루는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의 문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100년도 더 전에 니체가 제시하여 여러 철학자에 의해 다뤄진 주제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 시대에 범람하는 미디어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허무주의를 뛰어난 서사와 연출로 다루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에블린이 모든 평행우주에 존재하게 되는 경험을 영화는 누미노제적 경험을 자아내는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체험시킨다. 또, 이 영화는 스스로의 철학에 대해 직접적인 대사로 주석을 단다. 이는 종교가 신화를 이야기하면서도 교리를 통해 신화 속 메시지를 구체화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영화의 서사적 측면에서는 우주적인 이야기와 일상적인 이야기 사이를 오가는 점에서 신화와의 유사점이 있다. 이렇듯 여러 차원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종교를 닮아있고 종교학적 관점에서 해석할 때 서사 구조와 연출의 효과에 더 풍부한 해석을 더할 수 있었다. 또한 종교와의 유사점으로부터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일종의 종교적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Daniel Kwan, Daniel Scheinert,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황석희 역, AGBO, 2022.
  2. Ninian Smart, <<종교와 세계관>>, 김윤성 역, 이학사, 2017, 142쪽.
  3. 위의 책, 94쪽.
  4. Daniel Kwan, Daniel Scheinert, 앞의 영화, 01:27:56.
  5. 위의 영화, 01:37:41.
  6. 위의 영화, 01:39:29.
  7. 위의 영화, 01:47:39.
  8. Ninian Smart, 앞의 책, 93쪽.
  9. 위의 책, 143쪽.
  10. 위의 책, 위의 면.
  11. 위의 책, 위의 면.
  12. 위의 책, 위의 면.
  13. Wendy Doniger, <<암시된 거미>>, 최화선 역, 이학사, 2020, 38쪽.
  14. 위의 책, 38쪽.
  15. 위의 책, 63쪽.
  16. Daniel Kwan, Daniel Scheinert, 앞의 영화, 01:36:05.
  17. 위의 영화, 01:46:28.
  18. 위의 영화, 01:45:25.

<참고문헌>

  • Doniger, Wendy, <<암시된 거미>>, 최화선 역, 이학사, 2020.
  • Kwan, Daniel, Scheinert, Daniel,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황석희 역, AGBO, 2022.
  • Smart, Ninian, <<종교와 세계관>>, 김윤성 역, 이학사, 2017.

마치며

길게 붙일 사족은 없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 하나는 교리적 특징 몇가지를 얼버무렸다는 점이다. 조금 더 상상을 잘하게 된 지금의 나는 할 얘기를 더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산책을 가야할 시간이다. 빠트린 교리적 특징들은 이 글을 함께 읽는 여러분이 함께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참고로 이건 일전에 예고한 정기연재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목록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