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너의이름은.>*(신카이 마코토, 2016) 재개봉한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극장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중요한 반전이 있기 때문에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었습니다. 다 기억하는 채로 다시 보아도 좋은 영화였습니다. 여운이 좀 남아 오늘은 *<날씨의 아이>* 를 보았습니다. 처음 볼 때도 충격을 받았던 영화라 어딘가 감상을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블로그에서는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제가 지금 쓰는 이 글은 영화에 대해 소개하는 글은 아닙니다. 제 감상을 적는 글이니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께는 불친절할 것입니다. 어디선가 신카이 마코토는 일상 속에서 접하는 미묘한 감상을 포착하는 데 능하다라는 얘기를 들어서 이 영화는 어디에서 출발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됩니다. *<너의이름은.>* 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허전하고 아련한 기분을 포착했다고 합니다. *<날씨의 아이>* 는 장마철 날이 갤 때의 따뜻한 기분이 출발점이 되었으리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봅니다. 잘은 모르지만 각본이 나오는 과정이란 그렇지 않을까요. 처음에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다가 영상과 줄거리가 뻗어나가고 적당한 시의적 주제와 메세지가 기가 막히게 감겨들어가는 것이죠. 이 영화의 메시지는 개인주의적입니다. 개인주의라는 말이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 이 영화의 결말도 그런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선과 개인의 선이 일치할 때에는 개인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치가 상충할 때이죠. 만약 *<날씨의 아이>* 가 동화였다면 마지막에 히나를 구하는 것이 도쿄의 영구적인 침수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도 과감하게 개인과 공동체를 충돌시킨다는 점이 이 영화의 두번째로 인상적인 점이었고, 가장 인상적인 점은 그 충돌에서 결국은 개인의 손을 들어준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하여 도시를 구할 수 있다면 그래야만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그렇다고 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우리 모두의 집이 물에서 건져진다고 할 때 솔직히 그것을 마다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영화 내에서는 날씨의 아이라는 존재가 어디까지나 미신으로만 여겨져 좋게좋게 마무리가 됐지만 3년 내내 비가 오는 게 저 아이가 계속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게 진실로써 받아들여진다면 다수결의 폭력에 다시 한번 희생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영화가 희생의 가치에 의문을 던진다고 생각하고 바라볼 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개인이 바라는 것이 공동체 내지는 타인에게 해가 되고 거부당한다'는 점에서 히나와 호다카는 비슷한 위치에 있습니다. 히나가 땅 위에 계속 살아있음으로 인해 도쿄의 이상기후가 심각해지고, 호다카는 도쿄에 머묾으로 인해 치안을 어지럽히고(일단은 총기소지범이니까...) 케이스케가 유괴범으로 몰리고 딸의 양육권 심사가 불안해집니다. 주변의 불행이 꼭 둘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두 사람이 자신이 바라는 바를 포기함으로써 그러한 불행을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점에서 책임을 묻고 싶어질 것입니다. 히나는 그런 타인들의 불행을 감수하더라도 존재를 인정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반면 호다카는 결국엔 체포당해 가출했던 고향으로 돌려보내집니다. 히나는 인정받고 호다카는 인정받지 못한 것인가라고 생각하려다가 호다카도 성인이 되고나서는 도쿄로 돌아오니까 또 그것도 아닌가라는 생각도 드네요. 히나도 한번 하늘로 쫓겨났다가 돌아왔으니까요. 두 인물이 짊어지는 퇴출 - 땅으로부터의 퇴출과 도쿄로부터의 퇴출 - 의 무게도 사뭇 다르고 단순하게 대치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튼 볼만한 영화입니다. 여름에 겨울을 그리워한 적은 많았지만 겨울에 여름을 그리워한 것은 이 영화를 보면서 거의 처음인 것 같네요.
[스포일러] 날씨의 아이
37
0
목록
스즈메의 문단속도 몹시 기대가 됩니다. 전 다음 휴가때 보고오려고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