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자기는 말랑말랑한 게 좋더랬다. 그 말 전후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밑도끝도 없이 말랑말랑한 게 좋다는 그 말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을 실제로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른다. 말랑말랑한 게 뭘 말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저 말랑말랑만 남아있다. 오늘은 홀로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있다. 내가 사는 자취방은 사실 방이 아니라 다세대 단독주택 1층이다. 오늘처럼 윗집이 비는 날이면 내 노래를 들을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다. 누군가 가사를 지어 보여줬는데 그 내용이 삶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 같은 거창한 것이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오늘은 감상적인 밤이다. 작고 귀여운 노래가 당긴다. 말랑말랑한 기분이다. 들은 노래 중 하나를 추천하자면 Carpenters의 <Close To You>. 새들도 온동네 처녀들도 나도 네 곁에 있고 싶어 따라다닌다는 내용이다. 누군가 스토커 같다며 농담을 던지는 것이 들리는듯하다. 내 생각에는 피리부는사나이가 더 맞는 것 같다. 그 남자는 참 피곤할듯도 싶지만… 정말로 온동네 처녀가 따라다닌다기보다 그냥 화자가 보기에 너무 멋진 사람이라 세상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도는 걸테다. 말랑말랑한 기분이라면 역시 사랑 이야기를 해야겠지. 그렇지만 내가 사랑에 대해 잘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몇번인가 또래 여자아이를 마음에 품은 적 있지만 제대로 행동을 개시한 적은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하여 고백한다는 것은 관계를 바꾸는 일… 다시 말해 기존의 관계를 파괴하는 일이다. 고등학교 때에는 그게 두려워 가만히 있다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방식으로 끝냈다. 지금이라고 뭔가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정중하게 말을 걸거나 메일을 쓰는 법은 대학을 다니며 확실히 많이 늘었다고 최근 생각했는데 내 감정이나 호감을 드러내는 일에는 여전히 서툴다. 조금 부끄러우니 게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본다. 트릭컬을 좋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게임이 전략적으로 즐거워서 좋아했다면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생하게 그려지는 버터, 우이, 시온, 네르라는 인물들을 좋아하여 자꾸만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게임을 켜는 것이고, 그런 점이 부끄럽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듯한 기분이 들어 부끄럽다. 생각해보면 수학이나 컴퓨터를 좋아하는 것도 잘 드러내지 않았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별로 들어줄 사람도 없다. 외롭고 서러워진다. 눈물도 조금 났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는 그런 사람만 잔뜩 모아놓은 곳에 있다. 가끔 컴퓨터 되게 좋아하는 사람처럼 말해도 외롭지 않다. 상대방도 컴퓨터 되게 좋아하는 사람처럼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멀리멀리 돌아왔다. 연애를 아주 안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친구가 조금 더 좋아질 것 같으면 머릿속 천칭에 한쪽은 변화와 파괴를, 한쪽에는 지금의 즐거운 행복을 매달아보게 된다. 변화와 파괴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경험의 부족이 있기에 항상 그 값어치를 과소평가하고 상태유지를 선택하게 된다. 이성은 안간힘을 다해 감정을 설득하고 억지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언젠가 그 겁쟁이 같은 이성의 천칭이 설득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커지면 보가 무너지듯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짓도 여러번 하면 능숙해질테지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되는 활성화에너지가 너무 높다. 어느 만화 속 인물은 “너나 나 같은 사람은 술에 취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내가 그들과 같은 종류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무리 취하더라도 내 마음을 내비치지 않겠다는 그 굳은 결심만큼은 무너질 일이 없어보인다. 그 단단한 보 뒤에서 저수지는 흐르지 못한채 한없이 썩어간다. 항상 무언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지만 자신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참 게으른 인간이다. 사랑은 잘 모르겠지만 귀여운 것은 좋아한다.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귀엽다고 말하는 것인가? 친구들의 고생하는 모습과 헛소리와 최선을 다하는 모습, 즐기는 모습은 귀엽다. 어째서인지 전공책 여기저기에 되도 않는 유우머를 끼워넣으려 하는 저자들도 귀엽고 매번 완벽한 수업을 준비하지만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라이브코딩을 참지 못해 샛길을 거하게 헤매는 모 교수님이나 자신의 전공분야가 너무 재밌고 아름답다는 모 교수님도 귀엽다. 친구들을 돕는 일이 좋다면서 이것저것 셔틀을 딱 99번까지만 당해주는 버터도 귀엽고 왕이 하기 싫어서 자신을 계속 무책임공주로 부르길 원하지만 하늘이 내린 성군이라 자꾸만 재임기간이 늘어나는 것에 슬퍼하는 만화 주인공도 귀엽다. 제멋대로 자라난 가지에 가지런하게 피는 개나리도 귀엽고 꽃들 사이를 오가는 벌도 귀엽다. 요즘은 매일매일 귀여운 트릭컬 사도들을 만나고 만화들을 읽으며 연명해나가고 있다. 그전에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잘 모르겠다. 연애를 한다면 귀여움의 안정적인 수급이 가능해지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튼간에 나도 귀여워져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졸려서 하는 헛소리 같다.) 귀엽다는 말은 사랑스럽다는 말의 순화어일 것이다. 부끄러운… 쑥스러운 글이다. 하지만 내게는 자기 표현이 필요하다. 아니 그보다도 심리학개론 공부가 필요한가? 하기 싫다 하기 싫어~ 내일은 아마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아도 하게 되겠지….
말랑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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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힛 귀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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