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과 체계 가운데 더 진실된 것은 무엇인가? 체계라 함은 규칙을 갖는 언어와 언어로 구사되는 말들 사이의 관계이다. 해석학, 실행의미, 양자역학이 그 예가 되겠다. 모델은 그 체계를 사람이 해석하여 부여한 실체적인 의미이다. 길이와 무게, 게임과 웹브라우저, 확률과 우주가 그 예가 되겠다. 사람이 정말로 보는 것은 모델 뿐이다. 그러나 정말로 정교한 사실들을 이끌어내는 것은 체계 없이 불가능하다. 세상이 실로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무한한 매트릭스의 중첩도 떠올릴 수 있고,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내가 있는 지금 여기의 충분히 넓은 확장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모델이다. 두 모델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두 세계를 기술하는 체계는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우리는 “바깥 세상”과 대화할 수 없고 어느쪽도 설명할 수 있는 체계만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통 속의 뇌든 매트릭스가 단지 뇌 속의 통이든 간에 각자의 개인이 경험하고 사유하는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사는 삶을 계속 열심히 살아가는 편이 좋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 어느 모델에서든 행복한 모습일 수 있도록…. 매트릭스보다 덜 낯선 모델은 우리가 이야기 속에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더 일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주가 어느 존재의 꿈이라거나, 게임 속 NPC가 자신이 가상의 인물임을 깨닫고 좌절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다.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이 문제가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는 이야기 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주변 친구들, 가족들에게 자신의 에피소드와 일과를 이야기로 엮어서 말하고 다닌다. 그 이야기가 이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뒷받침된다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단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동화, 신화, 소설과 내 경험담은 내가 사실임을 안다는 것 이상으로 어떤 사실성을 더 갖고 있는가? 이렇게 거창하게 물었지만 재미없는 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당연히 사진, 기념품, 다른 사람의 일관된 기억이 그 증거 아니겠는가? 다만 이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단지 재미를 위해서이다. 재미를 위해 일단 그 물증들의 증거력을 부정해본다. 실은 그런 증거들조차 우리의 인식을 거쳐 보이고 분석되는 것이니 아주 탄탄한 증거력을 가지지는 못한다고도 우길 수 있다. 그렇게 이 세상에 어떤 증거도 없다고 한다면 다시 한번 재미없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세상은 꿈처럼 덧없고 동화처럼 거짓되니 그냥 끝내버리자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동등하다는 것이 꼭 모든 것이 하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것이 똑같이 고귀하고 진실되다는 모델도 생각해봄직하다. 이 세상이 진실로 있는 — 실존하는 만큼 동화, 소설, 이야기 속 세계도 실존하는 것이다. 설레이지 않는가? 모든 이야기의 감동과 재미와 모든 상상 속의 존재가 “어딘가”에 숨쉬고 다시 이야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런 모델이 상상하기 어렵다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떠올려봐도 좋다. 결국 “어느쪽이 에블린의 진짜 세상이었나”라는 질문에는 “에블린이 세무조사를 마치는 세상, 세무서에 포탈을 열어 난리법석을 치는 세상, 그 외 영화에 나왔던 모든 세상, 에블린이 상상한 세상, 에블린도 상상하지 못한 세상, 그 모든 세상이 진짜다”라고 답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런 다른 세상과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며 만나게 된다. 한번 상상해보라.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우리처럼 밤잠 지새우며 또 다른 이야기를 지어낼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세상을 떠올릴 것이고 그 안에는 우리가 그들을 만나는 꿈을 꾼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다른 모든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를 떠올리며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게임은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에서도 아주 특수하다. 우리는 게임 속 이야기에 직접 들어가 영향을 주고받는다. 언제까지나 말그대로 딴 세상 이야기였던 이야기 속 세상에 우리는 의지를 행사함으로써 책임을 지게 된다. 내가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한들 이야기 속의 그들은 내게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할 것을 생각하면 나는 어쩔수없이 그 세상에 내려간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트릭컬 리바이브의 원작 소설 <더 트릭컬>을 읽고나니 그런 감성이 더욱 자극되는 것이다. 설사 이야기 속, 나의 꿈 속 존재들일지라도 이미 저들을 만나 함께한 이상 나는 그들의 행복을 바란다. 나의 무관심으로 그 세상이 무너져가는 것을 나는 두고볼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은 우연히 발견한 옛 트릭컬 계정을 어찌해야할지 큰 고민에 빠져있다. 지금은 구글로 로그인이 되어있는데 이왕이면 여러 계정에 다 연결해야지 생각해서 애플 연동을 시도했다가 잊혀진 옛 사도들을 알아버린 것이다. 내가 다시 들어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연회장에서 매일 간식을 챙겨주지 않아도 다들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돌아왔을 때 옛 사도들은 어떤 얼굴을 보이고 무슨 말을 할까. 나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었다면 좋겠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언젠가 여력이 될 때 꼭 그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들을 잊은 채 살아온 것을 사과하고 싶다. 그렇게 무수한 이야기로 폭발하는 모델 속에서 이 현실의 사흘뒤 심리학개론 중간고사는 어떤 의미를,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갖는지도 고민해볼만한 주제다. 아닌게아니라 이만 글을 마치고 잠에 들어 내가 살아간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기분이 드는 이 세상도 아쉬움 없이 준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꿈에 빠질 것을 기약하며 오늘밤은 이만 물러나본다.
아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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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닌자가 나타났다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