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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춘천에서 열린 SIGPL 여름학교라는 학회에 와있다. SIGPL은 다른 말로 프로그래밍언어연구회이다.

오늘 아침 적당한 시간에 용산역에 도착하여 ITX 청춘을 타고 남춘천역으로 왔다. 청춘의 '춘'이 춘천이라면 '청'은 청량리역일까? 하지만 ITX는 청량리역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춘천의 푸르름을 말하는 걸까. 그 정도로 푸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오늘 비가 와서 색을 잘 못 보았는지도 모른다. 점심으로 역 바로 앞에 있는 닭갈비를 먹고 있자니 세찬 비와 함께 천둥이 우르르쾅쾅 치더랬다.

점심을 먹고는 바로 택시를 타고 강원대로 이동했다. 접수하고 뭐하고 하면 늦지 않을까 랩식구들 사이에 걱정이 오갔지만 그냥 무난하게 들어갔다. 첫 행사는 언어 모델을 실습하는 튜토리얼이었다. 최근 챗지피티니 코파일럿이니 하는 초대형 언어 인공지능이 화제다; 아니 이젠 화제도 아니고 그냥 일상에 재빠르게 침투하여 AI 없이는 코딩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와있다. 당연히 프로그래밍 언어 연구자들도 이놈을 어떻게 잘 써먹을까 고뇌를 하고 있는 참에 여기에서 호로록 훑게 된 것이다. 대충 API만 써서는 입맛대로 고치기가 어려우니 연구자라면! GPU 서버 하나 장만해서 직접 파이썬으로 이리저리 세세하게 설정해보면(fine-tuning) 어떻겠냐~ 하는 이야기다. 우리 랩은 약간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성격인지라 언어 모델을 손대지는 않고 있지만 금요일 점심마다 밥상에 오르내리고 있는 중요한 주제임은 틀림없다.

이후는 15개 가량의 번개 발표가 빠르게 이어졌다. 번개 발표란 한 명당 5분의 제한시간 내에 각자 준비한 발표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주제로 연구하고 있는지 큼직큼직하게 살펴볼 수 있다. 우리 랩은 주로 이론적인 내용을 다루는 데 반해 그곳에는 사용자와 피부를 맞대는 연구도 많이 있었다. 양자 컴퓨팅에 관한 연구도 꽤 있었고, 자바스크립트와 웹 어셈블리 표준 명세(spec)에 대한 검증도 인상깊었다.

숨가쁜 번개 발표가 끝나고 바로 옆 건물로 이동해 저녁을 먹었다. 메뉴로는 작은 피자 한 판과 햄버거, 500mL짜리 콜라가 나왔다. Or가 아니라 And로 연결된 점이 독특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양이 너무 많았다. 양도 양이고 피자가 식은 점도 아쉬웠다. 얼마나 많은 피자가 버려졌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햄버거는 의외로 맛있었다. 패티는 떡갈비 같은 맛으로 꽤 맛있는 편이었고 그 밑에 깔리는 야채는 이삭토스트 안의 양배추와 비슷했다. 이름이 오일장 햄버거? 그런 느낌이었는데 오일장은 왠지 Oil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본래 7시반까지 저녁 식사 시간으로 예정이 되어있었으나 그 전에 이미 포스터 발표가 거의 준비되어 있었다. 포스터 발표는 넓은 로비에서 벽을 따라 포스터를 걸어놓고, 각각의 연구생이 포스터를 설명하고 다른 연구생들과 토론하는 그야말로 학문 교류의 장이다. 나도 거기에 걸린 포스터를 하나하나 이해해보고자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제대로 그곳에 끼려면 연구생의 설명을 듣고 토론에 귀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낯선 분위기와 수많은 사람들, 지식의 최전선 속 작아진 느낌에 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포스터?에 붙이라고 스티커도 3장 주었는데 뭔가 이해하여 흥미를 느낄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도 하고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적극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것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좀 더 공부를 하고 내 연구를 하고 나면 분위기도 대충 파악하고 끼어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포스터들을 보면서 아무 질문도 떠오르지 않는 건 아마 몰이해에 따른 무관심일 것이다. 아무튼 노력해보도록 하자.

그런 느낌들을 적어두고 싶은 기분이 들어 이렇게 정말 오랜만에 장편의 일기 같은 걸 쓰게 되었다. 지금은 호스텔 2인실 침대에 홀로 앉아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다. 신경쓸 것 없는 깨끗한 방에 조용히 홀로 있으니 기분이 좋다. 내일과 모레도 여름학교는 계속된다. 일지는 계속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많이 배워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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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도 가고 랩실의 일원이 되고 피자랑 햄버거까지 먹고 .. 꿈나루학사시절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격세지감입니다. 고양이는 누가 챙겨주나요